한국평화협력연구원

손기웅원장 자료실

[손기웅의 통일문] "고르바초프의 ‘시나트라 독트린’.. 나는 나의 길을 걸었네, 마이웨이!" (최보식의 언…

페이지 정보

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2,784회 작성일 22-10-06 16:14

본문

[손기웅의 통일문] "고르바초프의 ‘시나트라 독트린’.. 나는 나의 길을 걸었네, 마이웨이!" (최보식의 언론, 2022.09.03)

https://www.bosik.kr/news/articleView.html?idxno=8112

‘시나트라 독트린(Sinatra Doctrine)’의 주인공, 소련의 초대이자 마지막 대통령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영면에 들었다.

1985년 소련공산당 서기장으로 권력 정상에 오른 그는 ‘페레스트로이카(개혁)’과 ‘글라스노스트(개방)’으로 상징되는 ‘새로운 정치적 사고(New Political Thinking)’를 펼쳤다. 국내는 물론이고 대외 관계도 대상에 포함되었고, 가장 기념비적 업적이 ‘브레즈네프 독트린(Brezhnev Doctrine)’과 결별한 것이다.

‘브레즈네프 독트린’은 전임 서기장 브레즈네프가 1968년 8월 체코슬로바키아에 대한 소련 군사개입을 정당화하며 내세웠던 원칙이다. 사회주의 국가의 주권은 그 나라의 발전 방향이 다른 사회주의 국가 및 국제 공산주의 운동의 이익과 충돌하지 않는 범위에서만 보장된다는 ‘제한 주권론’ 주장에 입각하였다. 1956년 10월 헝가리 자유 혁명을 유혈 진압했던 소련이 동부유럽 위성국가들의 내부 문제를 엄격히 통제하겠다는, 소련의 지역 패권을 명확히 보여주겠다는, 나아가 유럽 바깥 기존 사회주의체제의 변화 시도에 대해서도 군사적으로 직접 개입하겠다는 것이었다. 1979년 12월 아프가니스탄 침공도 여기에 근거하였다.

‘시나트라 독트린’은 고르바초프가 새로 정립한 원칙으로 서방의 ‘북대서양조야기구(NATO)’에 대항하여 소련이 맹주로 만든 동부유럽 ‘바르샤바조약기구(WTO)’ 국가들(동독·헝가리·체코슬로바키아·폴란드·불가리아·루마니아)이 각자의 내정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도록 허용한다는 원칙을 설명하기 위해 농담조로 붙인 이름이다. 프랭크 시나트라가 불러 세계적으로 인기를 얻은 노래 ‘My Way(나의 길)’, 특히 가사 중 ‘I did it my way(나는 나의 길을 걸었다/내 방식대로 살았다)’ 구절에 비유한 것이다. 고르바초프는 WTO 국가는 물론이고 모든 국가들에게 선택의 자유를 인정했다.

‘시나트라 독트린’은 새로운 정치적 사고의 일부였다. 1980년대 후반 확연히 드러난 소련 체제의 구조적 결함, 높아지는 경제 문제, 전 세계적인 반공(反共) 정서의 부상, 아프간 침공의 장기화 및 미국과의 군비경쟁으로 인한 경제적·정치적 부담, 주민들의 변화 요구 등으로 국내 문제 해결에도 벅차고 갈 길이 바쁜 소련이 동부 유럽이나 다른 지역 사회주의국가들에 소련의 의지를 강요하는 것이 점점 더 비현실적으로 되어간다는 사실을 직시했기 때문이다.

‘시나트라 독트린’은 그러나 세계사의 흐름을 바꾸었다. 고르바초프가 전혀 생각하지 못한 곳에서 변화가 시작되었다. 작은 물꼬가 터지자 댐이 무너져 내렸다.


‘범유럽연합(Paneuropean Union)’이 1989년 8월 19일 헝가리 소프론 인근 헝가리-오스트리아 국경에서 ‘범유럽 소풍(Pan-European Picnic)’을 벌였다. 대규모 평화 시위였다. 범유럽연합은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통합운동으로 1923년 리하르트 니콜라우스 폰 코우덴호페칼레르기 백작이 저서 ‘범유럽(Paneuropa)’ 출간을 통해 통일된 유럽 국가의 개념을 제시한 것이 출발이었다.

‘범유럽 소풍’은 시나트라 독트린을 시험하고자 기획되었다. 범유럽연합 회장이었던 오스트리아인 오토 폰 합스부르크는 ‘범유럽 소풍’에서 몇 시간만이라도 오스트리아-헝가리 국경을 개방하여, 즉 유럽에 드리워진 ‘철의 장막(Iron Curtain)’을 뚫어 이에 대한 고르바초프의 반응을 보고자 했다.

합스부르크는 당시 개혁 정치를 펼치며 서방과의 협력을 모색했던 헝가리 총리 미크로스 네메스에게 이를 제안했다. 네메스 총리는 수락함은 물론이고 함께 추진하기로 합의했다. NATO 회원국 어느 나라와도 국경을 접하지 않는 헝가리가 중립국 오스트리아와의 국경을 개방해도 ‘시나트라 독트린’을 선언한 소련이 적극적으로 개입하지는 않으리라는 계산도 있었다. ‘범유럽 소풍’의 공식 상징도 철조망을 뚫고 나오는 비둘기로 정하였다.


합스부르크와 네메스는 소풍 중간에 철의 장막, 실제 나무철조망 장벽을 3시간 동안 상징적으로 열기로 합의했다. 소풍에는 이미 분위기를 파악한 동독 주민도 여름휴가를 핑계로 동독의 공식적 허가를 받아 참여하고 있었다. 숨죽이며 기다리던 순간, 문이 열리자 600~700명의 동독 주민이 뛰어서 철의 장막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헝가리 국경경비대도 제지하지 않아 오스트리아에 도착했다. 1961년 8월 베를린장벽이 구축된 이래 최대 규모의 대량 탈출이었다.


<사진>헝가리-오스트리아 국경을 넘는 ‘범유럽소풍’ 여행객 / 사진=헝가리 관광청/DPA

고르바초프는 ‘시나트라 독트린’을 지켰고 개입하지 않았다. 즉시 동독 주민의 헝가리행 ‘엑소더스’가 시작되었고, 시험의 성공에 자신을 얻은 헝가리는 마침내 9월 10일 국경을 개방했다. 체코슬로바키아도 새로운 통로가 되었다. 한 달 안에 십만 명 이상의 동독 주민이 서독, 자유의 땅을 밟을 수 있었다.

베를린 장벽이 마침내 11월 9일 열렸다. 철의 장막이 무너졌고 독일이 통일되었으며 동구 공산권이 분해되었다. WTO가 해체되고 냉전이 종식되었으며 마침내 소련의 붕괴로 이어졌다. 통일된 독일의 베를린 연방의회 건물에는 ‘1989년 9월 10일은 독일 통일, 독립국가 헝가리 그리고 민주적 유럽을 위한 독일 및 헝가리 민족 간 우호의 상징’이라 새겨진 헝가리 국경 개방 기념판이 부착되었다. 고르바초프 없이는 불가능한 대변혁이었다.

고르바초프, 그만큼 극단적으로 반대적인 평가를 받는 정치지도자도 없다. 진보적이고 개방적이며, 동서방 간 교량을 건설하고, 독일 통일을 승인한 그에게 서방과 독일은 큰 빚을 졌다.

반면 베를린장벽이 무너진 지 1년, 독일이 통일된 지 한 달이 지난 1990년 11월 7일 모스크바 레닌 묘소를 참배한 그에게 두 발이 총탄이 날아왔다. 대제국(大帝國) 소련 해체를 초래한 그를 모국 러시아는 저주한다. 그로 인해 누리게 된 자유는 거저 주운 듯 여긴다.

고르바초프 없이 독일 통일을 생각할 수 없다. 그의 부음을 접하고 그에게 바쳐진 독일 주요 언론의 기사 제목이다.

‘독일 통일을 가능하게 한 고르바초프’ ‘선견지명과 교량 건설자로 인정받은 고르바초프’ ‘인간의 얼굴을 한 크렘린 보스’ ‘그의 헌신이 우리의 역사를 바꿨다’ ‘역사의 문을 두드린 남자’ ‘독일인은 고르비를 사랑했으나 러시아에서 그는 소련의 무덤을 판 자로 간주되었다’

무엇이 옳고 그름을, 무엇이 좋고 나쁨을 인식하는 것과, 그 옳고 좋음을 실현가기 위해 결단하여 행동하는 것은 차원이 다르다. 고르바초프는 자기 길을 걸었다. 이제 다른 세상에서 ‘My Way’를 이어가고 있을 것이다.

2009년 5월 26일 강원도 화천군 평화의 댐에서 열린 ‘세계 평화의 종공원’ 준공식을 찾은 고르바초프, 6.25 전사자 위령탑에 묵념도 하였다. 세계 평화에 대한 그의 기여에 감사의 마음을 전할 수 있었다. 그의 명복을 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SITE MA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