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에서 백두산으로 - 52] "남포 소고(小考)" (매경프리미엄, 2022.0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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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2,409회 작성일 22-07-11 12:33본문
[베를린에서 백두산으로 - 52] "남포 소고(小考)" (매경프리미엄, 2022.06.27)
https://www.mk.co.kr/premium/special-report/view/2022/06/32103/
안개가 자욱한 남포항에 접어든다. 북측 도선사의 안내로 항에 들어서기는 했지만, 배는 접안하지 않고 항에 정박한다. 대표단만 내렸다. 비료 지원 차 찾은 2004년 초가을로 기억한다.
짙은 안개로 하역할 수 없으니 며칠간 하릴없이 기다리며 시간을 보낸다. 둘러보다 어슬렁거리는 흑염소 한 마리를 멀리서 본다. 저녁이 다가와서인지 일행 중 하나가 저놈 잡아먹으면 보신되겠다고 한다. 맞다, 한 번 물어나 보자. 분명 협동농장 소유일 텐데 혹시 돈벌이를 위해 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순식간에 스친다.
북 안내자에게 혹 저 염소 잡을 수 있을까요라고 물으니 지체도 없이 알아볼게요, 그런데 좀 비쌀 텐데요 한다. 아, 돈 걱정은 마시고 물어봐주세요 하고 기다린다. 잠시 후 돌아온 안내원은 된다며, 금액은 모두 합쳐 21달러라고 조금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전한다. 200달러라도 지불할 태세였는데 너무 싸 우리가 놀란다. 그럼 오늘 저녁 안내원과 종업원들 모두 와서 함께 저녁을 합시다고 초대했다. 일행은 벌써 염소는 내장이 제일 맛있다는 둥 입맛을 다신다.
염소 파티가 벌어졌다. 남북이 하나로 둘러앉아 잔을 돌리고 얘기꽃을 피운다. 북쪽이 원하는 종류의 술을 마음대로 고르고 마음껏 마시라고 했더니 분위기는 더욱 살아났다. 모두 합쳐 150달러를 지불했으나, 염소 내장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당시 북한은 평양 방문을 통제했다. 평양을 한번 가보자고 의견을 합치고, 북 안내원에게 부탁했다. 우리가 아직 평양을 가보지 못했는데 이번 기회가 아니면 언제 공화국의 수도를 볼 수 있겠는가, 꼭 보고 싶으니 부탁한다며 평양 칭송도 곁들였다. 안내원이 알아보겠다고 한다.
이틀이 지나고 안내원이 어렵게 조직했다며, 가능하다고 한다. 승용차도 구했고, 검문소도 가까운 데는 연락해두었다고 한다. 다만 평양까지는 몇 번의 검문을 받아야 하는데 다 통과가 가능할지는 장담하지 못한다고 못을 박는다. 비용은 1인당 100달러, 모두 300달러다.
낡은 벤츠에 기사와 안내원, 그리고 일행이 몸을 실었다. 이미 평양을 몇 번 다녀온 터라 북한의 행정전산화가 제대로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주변 모습을 눈에 담았다. 두 번의 검문을 거쳐 세 번째 인민군 검문에 막혔다. 상당 시간이 흐르고 돌아온 안내원은 도저히 안 된다며 평양행은 거기서 멈추었다. 대신 남포갑문과 일대를 관광했다. 일정을 마치고 안내원에게 돈을 지불하고 돌아서는데 안내원이 불러세우며 말한다. "선생님, 기사 100달러는 별도입니다."
남포외국선원구락부에 붙어 있는 기념품점에 들린다. 북한 그림에 관심이 많아 유심히 살피는데 마음에 들지 않는다. 북 판매원은 도자기 두 개를 보여준다. 두 작가의 이름을 대며 아주 유명한 사람이니 꼭 사라며 권한다. 흔히 대하는 매병이나 주병 모양이 아니라 내키지 않았다. 좋은 그림이 더 없냐고 물으니, 꼭 산다고 하면 자신이 평양에 가서 구해오겠다고 한다. 부탁했고, 다음날부터 그가 보이지 않았다.
안개가 걷히자 배는 접안하여 비료 하역을 신속히 마쳤다. 출발 전날 저녁 마침내 선원들의 하선이 허락되었다. 식사하며 선원들의 불만 겸 제안을 듣는다. 선장과 기관장 외에 하선이 허락되지 않는 것은 문제가 있다, 자신들은 전 세계를 돌며 대한민국을 알리는 민간외교관이다, 중국도 개방 전에 몇 번 들렀고 주민들과 어울리면서 한국 소식과 바깥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전했다, 북한과 협의하여 자신들도 자유롭게 내릴 수 있도록 해주면 북한 변화에 분명히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사진> ▲ 남포항 비료 지원 현장, 2007년 4월 초 / 사진=김충도
귀항이다. 고대하던 기념품 점원은 끝내 나타나지 않고 항에 정박한 배를 향해 작은 통통선에 올랐다. 매연이 너무 심해 선실에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아 바깥에 앉았다. 어디선가 선~생~니임, 선~생~니임 외침이 들린다. 돌아보니 부두에서 점원이 소리 지르고 있다. 작은 사람이 손을 흔들며 폴짝폴짝 뛰고 있다. 선장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배를 돌려줄 것을 간청한다. 부두에서 때아닌 난장이 벌어졌다. 평양에서 많이도 가져왔다. 어떻게 어렵게 구했는지, 오가는 길이 얼마나 어려웠는지, 이어지는 점원의 공치사에 여러 장을 구입할 수밖에 없다.
벽에 걸린 그림들을 바라본다. 그때 점원이 자랑한 도자기 작가, 우치선과 임사준이 북한 최고의 도자 명장인 것을 뒤늦게 알고는 얼마나 후회했는지.
통일이 된다고 해서 통합이 바로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법·제도적 통일은 시작일 뿐이다. 진정한 통합은 각자의 문화가 더 큰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 출발은 남북 문화의 같음과 다름에 대한 이해이다, 이런 마음으로 북한 예술품을 하나씩 모으기 시작했고 전시회도 가졌다. 우치선과 임사준의 작품도 한 점씩 결국 소장했다.
1998년 6월 22일, 무장간첩을 태운 북한 잠수정이 속초 앞바다에서 꽁치잡이 그물에 걸렸다. 몇 달 후 국방부가 안보 전문가 견학 행사를 가졌다. 헬기를 타고 원주 공군부대를 거쳐 동해 해군 1함대를 방문했다.
접안된 구축함을 안내받고 환담하던 중 일행 하나가 배 출항 한 번 시켜보시죠 하고 함장에게 건의했다. 함장은 흔쾌히 좋다며 출항을 지시한다. 함교 눈앞에서 함장의 지시가 복창, 복창되며 시동이 걸리고 부두에 대기 중이던 사병이 묶어둔 밧줄을 푼다. 그야말로 한 치의 틈도 없이 일사불란하게 빠르게 전개된다. 예인선의 안내를 받아 항구를 벗어나 전속력을 내기까지 거의 40분이 소요된다. 잠수정 포획 당시 해군 함정의 출동이 늦었다며 질타했던 여론에 동조했던 생각에 변화가 생겼다.
여수에서 남포까지, 다시 인천으로 오가며 배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선원들이 고생하는지를 눈여겨봤다. 함정과 상선의 선원 모두 이름 없는 애국자다.
https://www.mk.co.kr/premium/special-report/view/2022/06/32103/
안개가 자욱한 남포항에 접어든다. 북측 도선사의 안내로 항에 들어서기는 했지만, 배는 접안하지 않고 항에 정박한다. 대표단만 내렸다. 비료 지원 차 찾은 2004년 초가을로 기억한다.
짙은 안개로 하역할 수 없으니 며칠간 하릴없이 기다리며 시간을 보낸다. 둘러보다 어슬렁거리는 흑염소 한 마리를 멀리서 본다. 저녁이 다가와서인지 일행 중 하나가 저놈 잡아먹으면 보신되겠다고 한다. 맞다, 한 번 물어나 보자. 분명 협동농장 소유일 텐데 혹시 돈벌이를 위해 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순식간에 스친다.
북 안내자에게 혹 저 염소 잡을 수 있을까요라고 물으니 지체도 없이 알아볼게요, 그런데 좀 비쌀 텐데요 한다. 아, 돈 걱정은 마시고 물어봐주세요 하고 기다린다. 잠시 후 돌아온 안내원은 된다며, 금액은 모두 합쳐 21달러라고 조금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전한다. 200달러라도 지불할 태세였는데 너무 싸 우리가 놀란다. 그럼 오늘 저녁 안내원과 종업원들 모두 와서 함께 저녁을 합시다고 초대했다. 일행은 벌써 염소는 내장이 제일 맛있다는 둥 입맛을 다신다.
염소 파티가 벌어졌다. 남북이 하나로 둘러앉아 잔을 돌리고 얘기꽃을 피운다. 북쪽이 원하는 종류의 술을 마음대로 고르고 마음껏 마시라고 했더니 분위기는 더욱 살아났다. 모두 합쳐 150달러를 지불했으나, 염소 내장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당시 북한은 평양 방문을 통제했다. 평양을 한번 가보자고 의견을 합치고, 북 안내원에게 부탁했다. 우리가 아직 평양을 가보지 못했는데 이번 기회가 아니면 언제 공화국의 수도를 볼 수 있겠는가, 꼭 보고 싶으니 부탁한다며 평양 칭송도 곁들였다. 안내원이 알아보겠다고 한다.
이틀이 지나고 안내원이 어렵게 조직했다며, 가능하다고 한다. 승용차도 구했고, 검문소도 가까운 데는 연락해두었다고 한다. 다만 평양까지는 몇 번의 검문을 받아야 하는데 다 통과가 가능할지는 장담하지 못한다고 못을 박는다. 비용은 1인당 100달러, 모두 300달러다.
낡은 벤츠에 기사와 안내원, 그리고 일행이 몸을 실었다. 이미 평양을 몇 번 다녀온 터라 북한의 행정전산화가 제대로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주변 모습을 눈에 담았다. 두 번의 검문을 거쳐 세 번째 인민군 검문에 막혔다. 상당 시간이 흐르고 돌아온 안내원은 도저히 안 된다며 평양행은 거기서 멈추었다. 대신 남포갑문과 일대를 관광했다. 일정을 마치고 안내원에게 돈을 지불하고 돌아서는데 안내원이 불러세우며 말한다. "선생님, 기사 100달러는 별도입니다."
남포외국선원구락부에 붙어 있는 기념품점에 들린다. 북한 그림에 관심이 많아 유심히 살피는데 마음에 들지 않는다. 북 판매원은 도자기 두 개를 보여준다. 두 작가의 이름을 대며 아주 유명한 사람이니 꼭 사라며 권한다. 흔히 대하는 매병이나 주병 모양이 아니라 내키지 않았다. 좋은 그림이 더 없냐고 물으니, 꼭 산다고 하면 자신이 평양에 가서 구해오겠다고 한다. 부탁했고, 다음날부터 그가 보이지 않았다.
안개가 걷히자 배는 접안하여 비료 하역을 신속히 마쳤다. 출발 전날 저녁 마침내 선원들의 하선이 허락되었다. 식사하며 선원들의 불만 겸 제안을 듣는다. 선장과 기관장 외에 하선이 허락되지 않는 것은 문제가 있다, 자신들은 전 세계를 돌며 대한민국을 알리는 민간외교관이다, 중국도 개방 전에 몇 번 들렀고 주민들과 어울리면서 한국 소식과 바깥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전했다, 북한과 협의하여 자신들도 자유롭게 내릴 수 있도록 해주면 북한 변화에 분명히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사진> ▲ 남포항 비료 지원 현장, 2007년 4월 초 / 사진=김충도
귀항이다. 고대하던 기념품 점원은 끝내 나타나지 않고 항에 정박한 배를 향해 작은 통통선에 올랐다. 매연이 너무 심해 선실에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아 바깥에 앉았다. 어디선가 선~생~니임, 선~생~니임 외침이 들린다. 돌아보니 부두에서 점원이 소리 지르고 있다. 작은 사람이 손을 흔들며 폴짝폴짝 뛰고 있다. 선장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배를 돌려줄 것을 간청한다. 부두에서 때아닌 난장이 벌어졌다. 평양에서 많이도 가져왔다. 어떻게 어렵게 구했는지, 오가는 길이 얼마나 어려웠는지, 이어지는 점원의 공치사에 여러 장을 구입할 수밖에 없다.
벽에 걸린 그림들을 바라본다. 그때 점원이 자랑한 도자기 작가, 우치선과 임사준이 북한 최고의 도자 명장인 것을 뒤늦게 알고는 얼마나 후회했는지.
통일이 된다고 해서 통합이 바로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법·제도적 통일은 시작일 뿐이다. 진정한 통합은 각자의 문화가 더 큰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 출발은 남북 문화의 같음과 다름에 대한 이해이다, 이런 마음으로 북한 예술품을 하나씩 모으기 시작했고 전시회도 가졌다. 우치선과 임사준의 작품도 한 점씩 결국 소장했다.
1998년 6월 22일, 무장간첩을 태운 북한 잠수정이 속초 앞바다에서 꽁치잡이 그물에 걸렸다. 몇 달 후 국방부가 안보 전문가 견학 행사를 가졌다. 헬기를 타고 원주 공군부대를 거쳐 동해 해군 1함대를 방문했다.
접안된 구축함을 안내받고 환담하던 중 일행 하나가 배 출항 한 번 시켜보시죠 하고 함장에게 건의했다. 함장은 흔쾌히 좋다며 출항을 지시한다. 함교 눈앞에서 함장의 지시가 복창, 복창되며 시동이 걸리고 부두에 대기 중이던 사병이 묶어둔 밧줄을 푼다. 그야말로 한 치의 틈도 없이 일사불란하게 빠르게 전개된다. 예인선의 안내를 받아 항구를 벗어나 전속력을 내기까지 거의 40분이 소요된다. 잠수정 포획 당시 해군 함정의 출동이 늦었다며 질타했던 여론에 동조했던 생각에 변화가 생겼다.
여수에서 남포까지, 다시 인천으로 오가며 배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선원들이 고생하는지를 눈여겨봤다. 함정과 상선의 선원 모두 이름 없는 애국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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