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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에서 백두산으로 - 56] "평양 통일휴게소 (중)" (매경프리미엄, 2022.0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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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2,385회 작성일 22-08-01 1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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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에서 백두산으로 - 56] "평양 통일휴게소 (중)" (매경프리미엄, 2022.07.25)

https://www.mk.co.kr/premium/special-report/view/2022/07/32220/


동독이 왜 멸망했는가를 가장 심도 있게 분석한 나라는 북한일 것이다. 동독 꼴이 되지 않으려 가장 심각하게 대응방안을 강구한 나라도 북한일 것이다.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평화통일을 이룩해야 할 우리에게 통일이 더욱 힘들어진 것이다.

북한은 이렇게 원인을 찾았을 것이다.

첫째, 서독과 교류협력을 통해 동독 주민이 자본주의에 물들었다. 필요한 외화와 물자를 획득하기 위해 교류협력을 하더라도 주민을 강력하게 통제해야 했는데 그렇지 못하였다.

둘째, 동독 권력층의 부패다. 서독과 접촉과 교류협력을 통해 떨어지는 콩고물을 먹었을 것이고, 그 과정에서 사회통제와 서독 대응에 단호하지 못했다. 공산당 서기장 에리히 호네커가 서독으로부터 획득한 외화 가운데 매년 1억달러를 용돈으로 챙겼다는 사실이 통일 이후 밝혀졌다(동독의 갑작스러운 붕괴를 예상치 못했던 호네커는 받은 돈의 반 이상을 사용하지 않고 은행에 쌓아두었다가 통일 이후 모두 압수당했다).

셋째, 사회 동요 시기 동독 최고결정권자의 무능력이다. 주민의 변화 요구가 거세지고 데모 행렬이 사회 안정을 해쳤을 때, 과감히 진압했어야 했는데 하지 않았다. 결단력이 없었다.

넷째, 소련의 배신이다. 동독군이 사회주의체제 수호에 개입할 수 있도록 사회주의 형제국이자 종주국인 소련이 적극 뒷받침해줬어야 했는데 그렇지 않았다. 소련은 자신의 체제 유지를 위해 오히려 서독과 밀당했다.


<사진> ▲ 1984년 동베를린, 1986년 평양에서 김일성과 에리히 호네커

북한 수령은 대응책을 만들었고, 김정은에게도 이어졌을 것이다. 첫째, 외화와 물자 획득을 위해 남쪽과 교류협력할 수밖에 없다. 다만 주민을 사상적으로 완전히 틀어쥐어야 하며 그렇게 할 자신이 있다. 그럼에도 자신들이 원하는 내용과 방법으로 남쪽과 교류협력한다. 그 과정에서 정치·군사적 긴장 유지는 필수다.

둘째, 대남 사업 담당 북한 권력층의 부패를 철저히 감시한다. 중국이나 다른 국가 사업종사자도 마찬가지다. 장성택을 처형한 것도, 최룡해 등 아버지 시대 측근들을 들었다 놨다 한 이유도 그들이 가졌던 자산과 이권을 빼앗아 김정은 자신의 통치자금으로 활용하고자 했던 것이 컸다. 다만 당서기장과 비교될 수 없는 절대권력자 수령으로서 자신만이 창출되는 모든 돈줄을 움켜쥔다.

셋째, 자신을 제외한 누구도 여차하면 고사포로 벌집을 만들거나 독약으로 처형됨을 공개리에 보여주었다. 인민무력부장 현영철, 이복형 김정남이 상징적 사례다. 다른 생각을 가지는 그 자체가 반역이라는 공포감을 체감시킨다.

넷째, 믿을 데는 자신밖에 없다. 중국과 러시아도 믿지 못한다. 생존과 체제 유지를 위해 관계를 유지하고 개선할 수밖에 없지만, 그들도 언제 어떻게 바뀔지 알 수 없다. 1970년대 긴장완화 시기 이미 보여주었던 바고, 지금의 그들은 사회주의 원칙에서 벗어났다. 주체사상을 더욱 높이 세우고, 핵 무력 개발에 박차를 가할 수밖에 없다. 핵 보유야말로 한·미·일은 물론이고, 중국과 러시아를 움직이게 할 수 있는 유일한 무기다.

북한은 독일이 통일된 후 2000년대 초까지 1000명 이상의 인력을 독일에 상주시켰다고 한다. 없는 살림에 외화를 쓰며 관광으로 머물지는 않았을 것이다. 장학금이나 독일의 지원으로 온 사람도 제한적일 것이다. 대부분은 동독이 왜 무너졌는가를 분석하고, 통일 과정과 통일 이후의 문제점은 무엇인가를 연구하였을 것이다. 동독 권력엘리트들이 통일 이후 어떻게 되었는지, 동독 공산당이 통일 이후 어떻게 변신하고 생존에 성공했는지도 관심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독일 통일로 더욱 힘들어진 우리의 통일 노력에 크게 도움이 될 수 있는 방법이 있다. 북한이 행했던 독일통일 연구를 살펴보는 일이다. 독일통일 사례에 대한 우리의 연구와 그로부터의 시사점 도출이 더 큰 유의미한 정책적 함의를 가지기 위해서 동일한 사례로부터 북한이 도출했을 분석과 정책적 시사점도 입수해 함께 연구하는 것이다.

여기에 통일독일이 도와줄 수 있다. 분단 시기 동독이 같은 분단국가였던 한반도 통일, 남한과 북한의 관련 정책에 관해 어떠한 관심을 가졌는가, 동독과 북한이 어떤 분야에서 어떻게 협력했는가, 동독의 변화와 소멸의 시기 그리고 통일 이후에 북한이 어떤 관심을 가졌는가에 관한 자료를 통일독일이 가지고 있을 것이다. 특히 동독 비밀경찰인 국가안보성 슈타지(Stasi)의 북한 관련 자료가 유용할 것이다.


<사진> ▲ 동독 슈타지와 북한 국가보위부 간 협력을 위한 합의서 초안


<사진> ▲ 베를린장벽이 무너지기 직전인 1989년 9월 17일~25일 간 평양에서 열린 “범죄 예방 및 범죄와의 전쟁에서 사회 제세력 활용 및 이를 위한 현대적 과학기술 이용” 주제 회의에 참가한 동독 내무성 대표단 활동 관련 10월 3일자 동독 슈타지 보고서. 동독 외에 소련, 폴란드, 중국, 헝가리, 불가리아, 루마니아, 쿠바, 몽골도 참가했다.


<사진> ▲ 1989년 10월 26일~11월 3일 간 동독 슈타지를 방문한 북한 국가보위부 일행의 동향을 기록한 11월 8일자 슈타지 보고서. 다음날 11월 9일 베를린장벽이 무너졌다.


통일 이후도 마찬가지다. 북한과 외교 관계를 수립하고 많은 사업을 벌이고 있는 통일독일이다. 북한 인사를 중국이나 제3국에 초청하여 자본주의 경제를 교육시키고, 군축·환경보호·산림·에너지 등 다양한 분야에서 인적 교류와 지원사업을 펼치고 있다. 그 과정에서 독일이 획득했을, 북한이 표출했을 독일통일 관련 관심 사항, 북한이 진행했을 독일통일 관련 분석과 대응방안에 관한 연구가 우리의 연구대상인 것이다.

문재인 정권 5년 동안 독일통일 사례는 백안시되었다. 자유민주주의체제로, 한 국가로 통일되었기 때문이다. 바로 그 때문에, 대한민국 헌법에 규정된 통일방식으로 통일되었기 때문에 독일통일 사례가 중요함에도 배척되었다.

독일통일을 다시 들여다봐야 한다. 동독과 북한의 관계, 북한의 독일통일 연구도 그중의 하나다. 남북한 양쪽과 관계를 유지하고, 협력하고 있는 독일의 중요성을 잊지 말아야 한다. 평양의 시가지와 건물에서 동베를린 냄새가 진하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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