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에서 백두산으로 - 34] "니더작센 통일휴게소" (매경프리미엄, 2022.02.21)
페이지 정보
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2,433회 작성일 22-03-30 11:57본문
[베를린에서 백두산으로 - 34] "니더작센 통일휴게소" (매경프리미엄, 2022.02.21)
https://www.mk.co.kr/premium/special-report/view/2022/02/31549/
1990년 3월 18일 동독 주민이 자유총선에서 자유의지로 서독과의 조속한 통일을 선택하여 '민족 통일'을 결정지은 후 남은 것은 '법적 통일'이었다. 독일의 분단과 분단 극복에 관해 국제법적 권리를 가졌던 전승 4국은 물론, 모든 국가들은 독일 통일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게 되었다. 통일에 대한 민족자결권을 서독이 아니라 공산주의 체제에서 고통을 겪었던 동독 주민이 직접 행사하고 표출한 이상 누구도 반대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국가들, 특히 서방 유럽국들의 속내는 착잡했다. 멀리는 비스마르크의 통일전쟁으로부터 가깝게는 제2차 세계대전에 이르기까지 독일로 인해 얼마나 크고 많은 고통을 겪었던가. 다시는 전쟁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분단시키고, NATO(북대서양조약기구)란 군사동맹체제에 묶어두었는데. 알자스로렌 지방의 석탄과 철강을 한 국가가 독점하려는 것이 전쟁의 불씨가 되었다는 반성에서 유럽에서 석탄과 철강의 단일시장을 형성하고 평화적으로 함께 공유하며 공존하기 위해 '유럽석탄철강공동체(European Coal and Steel Community·ECSC)'를 시작하였고, '유럽공동체(European Community·EC)'를 거쳐 이제 '유럽연합(European Union·EU)'으로 진전시키려는 상황인데. 라인강의 기적을 이루고 'Made in Germany'로 상징되는 강력한 서독이 통일되어 강력한 경제대국, 정치강국으로 성장하게 된다면 유럽대륙에 또 어떠한 광풍이 몰아칠지.
전승 4국에는 어떠한 영토 위에, 어떠한 군사안보적 위상과 역할, 그리고 군사력을 가진 통일독일을 허용하느냐가 문제였다.
서독에는 분단 극복과 함께 통일된 독일의 평화와 자유 수호, 그리고 공동 번영 의지에 관해 전승 4국과 이웃 국가들이 믿음을 가지도록 해야 하는,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아야 하는 문제였다. 니더작센주를 떠나기 전 다섯 번째 통일휴게소에 들르며 독일 통일의 일곱 번째 시사점을 새겨본다.
<사진>
▲ 유럽석탄철강공동체 기(旗)와 서독 발행 25주년 기념 초일봉피(初日封皮)
<사진>
▲ 유럽공동체 기(旗)와 서독 발행 30주년 기념 초일봉피(初日封皮)
7. 서독의 통일외교 1: EC로의 통합을 통한 통일
서독의 치밀하고 신속한 통일외교가 시동을 걸었다. 우선 협력과 갈등 속에서 함께 공동체를 일구어온 서방 EC 국가들을 설득하고 믿음을 주어야 했다. 서독은 서방 국가들이 가지는 복합적 우려를 체계적으로 정리했다.
첫째, 경제적으로 가장 강력한 독일이 통일됨으로써 더욱 강력해진 지배적인 국가가 될 것이라는 우려다.
둘째, 가장 큰 재정적 기여를 하고 있는 서독이 통일에 매달려 공동체에 대한 기여도를 줄일 것이라는 우려다.
셋째, 통일된 독일이 과연 지속적으로 서방통합을 계속 추진할 것인가 하는 우려다.
넷째, 역사적 경험에 비추어볼 때 과연 독일의 정책을 신뢰할 수 있느냐 하는 근본적인 우려다.
<사진>
▲ 동독 주민에 둘러싸인 콜 수상 / 사진=dpa
<사진>
▲ 제1차 세계대전 시 가장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베르됭(Verdun)에서 손잡은 콜과 미테랑 / 사진=key
이를 타결하기 위해 서독은 'EC로의 통합을 통한 독일 통일' 전략을 펼쳤다.
첫째, 헬무트 콜 수상과 한스-디트리히 겐셔 외무장관은 "우리는 독일적인 유럽이 아니라, 유럽적인 독일을 건설하고자 한다"라고 기회 있을 때마다 강조하였다. 통일이 단순한 동서독 간의 결합이 아니라, 서독이 이미 견고하게 결속되어있는 서방체제로 동독을 편입시키는 통일로서 유럽통합의 발전을 위해서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임을 강조하였다.
둘째, 독일이 유럽통합을 심화시킬 것에 대한 확고한 의지를 가시적으로 보여주었다. 콜은 1993년까지 완성할 '유럽통화연맹(European Monetary Union)' 외에도 EU의 설립을 위해 적극 노력할 것을 약속하였다.
셋째, 서독은 통일독일이 EC 내에서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될 것을 우려하는 공동체 회원국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통일 이후에 EC 내 의사결정 과정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유럽집행위원회 위원, 유럽의회 의원 및 유럽법원 법관의 수를 독일이 더 많이 요구하지 않기로 하였다.
넷째, 서독의 경제력이 안정되고 강력하여 통일 이후에도 EC에 대한 기여를 줄이지 않고 동독에 투자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다섯째, 독일의 통일로 인해 소비 수요가 늘어나 EC 국가들의 경제성장이 추가될 수 있고, 동독을 통해 동유럽 국가들을 경제적으로 개방시킬 수 있으며, 통일된 독일의 경제가 활성화될 경우 EC에 대한 독일의 경제적 기여가 더욱 커질 수 있다는 논리로 회원국들을 설득하였다.
분단 이후 서독이 다시는 파쇼적인 군국주의 길을 걷지 않을 것임을, 평화 속에 공존할 수 있는 '자유롭고 민주적인 기본질서(freiheitliche demokratische Grundordnung)'의 국가가 될 것임을 보여주고 만들어왔던, 과거사에 대한 철저한 반성을 바탕으로 '지역통합을 통한 민족통합(nationale Integration durch regionale Integration)'을 추진했던 노력이 열매를 맺기 시작했다. 미국이 이를 받쳐주었다.
<사진>
▲ 1987년 6월 12일 브란덴부르크 개선문 앞에 선 레이건과 콜, 레이건은 고르바초프에게 이 문을 열 것을, 이 벽을 허물 것을 요구했다. (“Mr. Gorbachev, open this gate. Mr. Gorbachev, tear down this wall.”) / 사진=AP
https://www.mk.co.kr/premium/special-report/view/2022/02/31549/
1990년 3월 18일 동독 주민이 자유총선에서 자유의지로 서독과의 조속한 통일을 선택하여 '민족 통일'을 결정지은 후 남은 것은 '법적 통일'이었다. 독일의 분단과 분단 극복에 관해 국제법적 권리를 가졌던 전승 4국은 물론, 모든 국가들은 독일 통일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게 되었다. 통일에 대한 민족자결권을 서독이 아니라 공산주의 체제에서 고통을 겪었던 동독 주민이 직접 행사하고 표출한 이상 누구도 반대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국가들, 특히 서방 유럽국들의 속내는 착잡했다. 멀리는 비스마르크의 통일전쟁으로부터 가깝게는 제2차 세계대전에 이르기까지 독일로 인해 얼마나 크고 많은 고통을 겪었던가. 다시는 전쟁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분단시키고, NATO(북대서양조약기구)란 군사동맹체제에 묶어두었는데. 알자스로렌 지방의 석탄과 철강을 한 국가가 독점하려는 것이 전쟁의 불씨가 되었다는 반성에서 유럽에서 석탄과 철강의 단일시장을 형성하고 평화적으로 함께 공유하며 공존하기 위해 '유럽석탄철강공동체(European Coal and Steel Community·ECSC)'를 시작하였고, '유럽공동체(European Community·EC)'를 거쳐 이제 '유럽연합(European Union·EU)'으로 진전시키려는 상황인데. 라인강의 기적을 이루고 'Made in Germany'로 상징되는 강력한 서독이 통일되어 강력한 경제대국, 정치강국으로 성장하게 된다면 유럽대륙에 또 어떠한 광풍이 몰아칠지.
전승 4국에는 어떠한 영토 위에, 어떠한 군사안보적 위상과 역할, 그리고 군사력을 가진 통일독일을 허용하느냐가 문제였다.
서독에는 분단 극복과 함께 통일된 독일의 평화와 자유 수호, 그리고 공동 번영 의지에 관해 전승 4국과 이웃 국가들이 믿음을 가지도록 해야 하는,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아야 하는 문제였다. 니더작센주를 떠나기 전 다섯 번째 통일휴게소에 들르며 독일 통일의 일곱 번째 시사점을 새겨본다.
<사진>
▲ 유럽석탄철강공동체 기(旗)와 서독 발행 25주년 기념 초일봉피(初日封皮)
<사진>
▲ 유럽공동체 기(旗)와 서독 발행 30주년 기념 초일봉피(初日封皮)
7. 서독의 통일외교 1: EC로의 통합을 통한 통일
서독의 치밀하고 신속한 통일외교가 시동을 걸었다. 우선 협력과 갈등 속에서 함께 공동체를 일구어온 서방 EC 국가들을 설득하고 믿음을 주어야 했다. 서독은 서방 국가들이 가지는 복합적 우려를 체계적으로 정리했다.
첫째, 경제적으로 가장 강력한 독일이 통일됨으로써 더욱 강력해진 지배적인 국가가 될 것이라는 우려다.
둘째, 가장 큰 재정적 기여를 하고 있는 서독이 통일에 매달려 공동체에 대한 기여도를 줄일 것이라는 우려다.
셋째, 통일된 독일이 과연 지속적으로 서방통합을 계속 추진할 것인가 하는 우려다.
넷째, 역사적 경험에 비추어볼 때 과연 독일의 정책을 신뢰할 수 있느냐 하는 근본적인 우려다.
<사진>
▲ 동독 주민에 둘러싸인 콜 수상 / 사진=dpa
<사진>
▲ 제1차 세계대전 시 가장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베르됭(Verdun)에서 손잡은 콜과 미테랑 / 사진=key
이를 타결하기 위해 서독은 'EC로의 통합을 통한 독일 통일' 전략을 펼쳤다.
첫째, 헬무트 콜 수상과 한스-디트리히 겐셔 외무장관은 "우리는 독일적인 유럽이 아니라, 유럽적인 독일을 건설하고자 한다"라고 기회 있을 때마다 강조하였다. 통일이 단순한 동서독 간의 결합이 아니라, 서독이 이미 견고하게 결속되어있는 서방체제로 동독을 편입시키는 통일로서 유럽통합의 발전을 위해서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임을 강조하였다.
둘째, 독일이 유럽통합을 심화시킬 것에 대한 확고한 의지를 가시적으로 보여주었다. 콜은 1993년까지 완성할 '유럽통화연맹(European Monetary Union)' 외에도 EU의 설립을 위해 적극 노력할 것을 약속하였다.
셋째, 서독은 통일독일이 EC 내에서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될 것을 우려하는 공동체 회원국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통일 이후에 EC 내 의사결정 과정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유럽집행위원회 위원, 유럽의회 의원 및 유럽법원 법관의 수를 독일이 더 많이 요구하지 않기로 하였다.
넷째, 서독의 경제력이 안정되고 강력하여 통일 이후에도 EC에 대한 기여를 줄이지 않고 동독에 투자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다섯째, 독일의 통일로 인해 소비 수요가 늘어나 EC 국가들의 경제성장이 추가될 수 있고, 동독을 통해 동유럽 국가들을 경제적으로 개방시킬 수 있으며, 통일된 독일의 경제가 활성화될 경우 EC에 대한 독일의 경제적 기여가 더욱 커질 수 있다는 논리로 회원국들을 설득하였다.
분단 이후 서독이 다시는 파쇼적인 군국주의 길을 걷지 않을 것임을, 평화 속에 공존할 수 있는 '자유롭고 민주적인 기본질서(freiheitliche demokratische Grundordnung)'의 국가가 될 것임을 보여주고 만들어왔던, 과거사에 대한 철저한 반성을 바탕으로 '지역통합을 통한 민족통합(nationale Integration durch regionale Integration)'을 추진했던 노력이 열매를 맺기 시작했다. 미국이 이를 받쳐주었다.
<사진>
▲ 1987년 6월 12일 브란덴부르크 개선문 앞에 선 레이건과 콜, 레이건은 고르바초프에게 이 문을 열 것을, 이 벽을 허물 것을 요구했다. (“Mr. Gorbachev, open this gate. Mr. Gorbachev, tear down this wall.”) / 사진=AP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