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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에서 백두산까지 -28] "작센안할트 통일휴게소" (매경 프리미엄: 2022.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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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2,396회 작성일 22-02-03 2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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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에서 백두산까지 -28] "작센안할트 통일휴게소" (매경 프리미엄: 2022.01.10)

https://www.mk.co.kr/premium/special-report/view/2022/01/31361/

독일 통일이 한 체제가 다른 체제를 없앤 '흡수통일'이라 주장하면서 독일식은 우리의 통일방식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럼에도 동서독 간에 이루어진, 정권을 넘어서는 교류협력을 들어 남북 교류협력의 중요성은 강조한다. 서독이 교류협력으로 동독 주민의 삶과 인권을 개선한 데는 눈 감는다. 문재인 정부 얘기다.

'평화적 합의통일'이 독일통일이다, 흡수통일이 아니다. 그 원동력은 동독 주민이 서독체제를 자신들의 희망으로 받아들인 데 있다. 서독은 동독과 접촉과 교류협력을 통해 그 길을 닦았다.

헌법 제4조 '자유민주주의에 기초한 평화통일'을 존중한다면 독일통일이 우리가 지향해야 할 통일방식의 토대다. 베를린 → 샬호수 → 엘베강에 이어 들리는 네 번째 통일휴게소에서 독일통일의 여섯 번째 시사점을 고(告)한다.

▲ 1989년 5월 7일 동독 지방선거에서 유권자는 투표용지를 한 번 접어 옆에 놓인 동독 국장(國章)이 그려진 투표함에 넣었다. 자유, 비밀 선거는 언감생심(焉敢生心)이었다. 공산당서기장 에리히 호네커가 지켜보고 있다. / 사진= dpa

▲ 주민들의 요구에 의해 처음으로 참관이 허용된 개표에서도 명백한 조작이 자행되었다. 동독은 98.85%가 친여세력인 ‘민족전선(Nationale Front)’에 찬성했다고 발표했다. 이전 1986년까지 선거에서 찬성이 항상 99% 이상이었던데 비해 그나마 민심을 고려한 조치였다. / 사진=Bundesstiftung Aufarbeitung

▲ 모든 선거구에서 득표조작이 있었고, 정부 발표와 주민 참관자 간에 11.42%까지 차이(사진 위 우측 노란색 부분)를 보였다. 선거부정이 주민 봉기의 한 축이 되었다 / 사진=ZDF, Robert-Havemann-Gesellschaft/Röder


6. 자유총선거에 의한 동독 주민의 민족자결권 행사

지난 세기에 국제사회에서 가장 높게 받아들여진 가치가 민족자결권(民族自決權)이었다. 전쟁에 승리하고 독일을 분단한 전승 4국(미국·영국·프랑스·소련)은 분단 기간 동안 독일분단의 극복 방법으로 민족자결권을 분명하게 밝혔다.

독일민족이 자신들의 미래를 스스로 결정한다는 달콤한 말이기는 했다. 하지만 유럽이 미·소 양 진양으로 갈라져 대립하는 가운데 미·영·프랑스는 서독을 그리고 소련은 동독을 확실히 장악하고 있는 상황에서 민족자결권의 행사란 연목구어(緣木求魚)에 다름이 아니었다.

상황이 변했다. 동독 주민이 통일을 절규하는 상황에서 그 가능성이 보였고, 서독은 놓치지 않았다.

서독은 동독 주민이 자신들의 미래를 위해 어떠한 정치적 선택을 할 것인가의 방법으로 자유로운 총선거를 적극 지지했다. 베를린장벽 붕괴 이후 체제 변화를 위해 시민대표들이 모여 과도정부의 역할을 했던 동독의 '원탁회의(Runder Tisch)'가 새로운 정부 구성을 위한 자유총선거를 제시했고, 이를 서독이 지지하는 형식으로 민족자결권 행사로의 길을 텄다.

사실 베를린장벽 붕괴 직후부터 서독 정부는 조용히 동독 사회에 다가갔다. 동독 내 새로운 정당 형성에 개입하였고, 동독의 성직자·평화운동가·언론인·학자 등 여론지도층에 적극 다가갔다.

동독이 자유총선거를 통한 민족자결권의 행사로 가는 과정에 대한 서독의 드러나지 않은 조용한 영향에 관해서는 아직 실증적인 연구가 진행되지 않았다. 분명한 사실은 서독이 개입하였다는 것이다. 장벽 붕괴 이전 1989년 동독 내 사회 변혁에도 서독이 개입 또는 영향력을 미쳤을 개연성이 있지만, 여기에 관해서도 역시 실증적 연구가 필요하다.

새로운 정부 구성을 위한 동독 총선거가 결정되자 전승 4국은 이제 통일문제는 그들이 약속한 대로 기본적으로 민족자결에 의한다는 원칙적 입장으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전 세계가 지켜보는 가운데 1990년 3월 18일에 실시된, 동독 40년 역사상 최초이자 마지막이었던 '자유로운 총선거'의 결과, 신속한 통일에 대한 동독 주민의 의지가 확고하게 드러났다. 이날 '독일 민족의 통일'은 이루어졌다.

동독 유권자 1240만여 명 가운데 93.4%가 참여한 투표(유효표 1154만927명)에서 모든 예상을 뒤엎고 '자유와 복지·사회주의 절대 반대(Freiheit und Wohlstand-Nie wieder Sozialismus)'를 공약한 CDU(기독교사회당), DSU(독일사회연합), DA(민주궐기당)의 '독일을 위한 연합(Allianz für Deutschland)'이 48%(40.8+6.3+0.9)로 압승했다. 신속한 통일을 반대한 SPD(사회민주당) 21.9%, 동독공산당 후신인 PDS(민주사회당)는 16.4%였다.

▲ 1990년 3월 18일 동독 총선 결과 /사진=bpb

동독 주민이 통일의 길을 열어젖혔다. 남은 과제는 '법적 통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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