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에서 백두산까지 - 32] "이름 없으나 있는 기념물" (매경 프리미엄, 2022.0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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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2,402회 작성일 22-02-16 10:51본문
[베를린에서 백두산까지 - 32] "이름 없으나 있는 기념물" (매경 프리미엄, 2022.02.07)
https://www.mk.co.kr/premium/special-report/view/2022/02/31487/
동서독 접경선 1393㎞를 달리다 보면 작으나 의미 있는, 이름 없으나 이름이 있어야 하는 기념물들을 만난다. 무명용사의 묘비를 본 듯 반갑기도 안타깝기도 하다. 만든 마음과 손길에 감사하며 잠시 숨을 고른다.
◆프레디의 접경탑
▲ 사진=손기웅
넓은 벌판을 지키듯 콘크리트 감시탑이 우뚝 서있다. 4x4 지휘용이다. 문은 닫혔으나 소유자의 이름과 주소, 일반전화·휴대폰 번호까지 자세히 적어놓았다. 관람을 원하면 언제든 연락하라는 의도다.
뒷마당에는 터무니없이 큰 탁자와 의자, 오토바이를 나무와 폐자재로 만들고 목장 출입문인 양 나무 문을 세우고 '프레디의 접경탑(Fredi's Grenzturm)'이라고 적었다. 분단의 아픔이 상상 이상으로 컸다는 것일까, 통일의 축복이 얼마나 큰지 보여주려는 것일까. 기어올라 그 뜻을 이리저리 재 본다. 결코 돈이 되지 않을 과거에 돈을 들이고 새 옷을 입혀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고 미래를 생각하게 하는 의식(意識)과 수준이 부럽다.
비무장지대(DMZ) 내에 남북이 구축한 전초기지(Guard Post), 그중 하나라도 반성과 이음과 다짐의 장소로 만들어 문을 열 그날을 그려본다. 군사적 필요에 의해 주위의 봉우리를 압도하고 계곡을 부라리며 감시하는 양측 최전방 군사기지를 언젠가는 인간 간, 인간과 자연 간의 평화를 체험하는 공간으로 탈바꿈해 보려는 꿈이다.
◆자유의 빛 박물관
▲ 사진=손기웅
시골길에서의 과속을 꾸짖듯 급히 멈추게 하는 철조망이다. 조그만 공간에 있을 것은 다 있다. 철조망 장벽, 둘러쳐진 전기선, 군견집과 감시 벙커, 차량방벽, 살인기계 자동발사장치 SM-70, 동독 국경표식지주와 국경표지판을 압축적으로 전시했다.
안내판에는 'Freilichtmuseum'이라고 적혀 있다. '야외박물관'으로 번역되지만, 'Freilicht'를 직역해 '자유의 빛'이나 '자유의 빛 박물관'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조성한 분들도 그러했으리라 짐작해 본다. 자유를 막고자 동독이 설치했던 죽음의 장치가 자유의 빛이 되어 자유를 상징하게 된 아이러니이자 은유(隱喩)다.
◆1989년 12월 21일 오전 8시
▲ 사진=손기웅
독일의 지리적 특징은 남쪽 알프스 지대를 제외하고는 산이 없다는 점이다. 지난 방문지 브로켄산만 예외다. 넓은 들판과 얕은 구릉이 펼쳐지고, 접경선 1393㎞를 달리는 동안 단 하나의 터널도 만나지 못한다.
속도 무제한 '아우토반(Autobahn)'을 질주하다 국도로 구불구불, 철마다 다른 빛을 뽐내는 밀과 호프의 벌판, 붉은 지붕지붕의 중세가 현대에 녹아든 아기자기한 동네 구경은 독일의 낭만이다. 여기에다 조그맣고 조금은 낡은 식당에서 그야말로 푸짐한 양에 넉넉한 정성이 담긴 향토음식에 곁들인 '스원한' 동네 산(産) 맥주는 분단과 통일로 벅찬 머리를 제대로 추스르게 한다.
진짜 이름이 없다. 도로변에 "이곳은 독일과 유럽이 1989년 12월 21일 오전 8시까지 분단되었다"고 쓰인 지도안내판이 서 있고, "1989년 12월 21일의 접경선개방을 기념하며"라고 새겨진 비석이 세워져 있다. 베를린장벽이 무너지고도 42일이나 닫혀 있었으니 그 속 탔던 마음의 발로였을까.
비석 한쪽에는 동독 국경표식지주가, 다른 편에는 유럽에 드리워졌던 '철의 장막(iron curtain)'을 따라 세운 '철의 장막 흔적(Iron Curtain Trail: ICT) 13' 표식기둥이 있다. 이 기념물 이름을 '통일 염원자'의 권한으로 '1989년 12월 21일 오전 8시'라고 명명했다.
참고로 'EuroVelo 13(EV13)'으로도 불리는 ICT 13 표식은 북극 바렌츠해에서 남쪽 흑해까지 전체 길이 7650㎞에 걸쳐 세워졌다. 지금의 '유럽 그린벨트(European Green Belt)'이기도 하다.
'EuroVelo'는 유럽에서 의미를 가지는 지역, 상징을 초국경으로 연결한 네트워크를 말한다. 'EuroVelo 1'은 '대서양 연안 길(Atlantic Coast Route)'이고, 가장 최근의 'EuroVelo 19'는 강변을 따라 만든 '뫼즈 사이클 루트(Meuse Cycle Route)'다.
분단도, 냉전도 이곳에는 지난 세기의 역사이자 기념물이 되었다. 새 세기에 강산이 두 번이나 바뀌어도 우리의 분단과 냉전은 여전함을 넘어 더욱 고착되어 간다. 분단에 적응하고 순응하며, 분단 속 '한 발로 뛰어야만 하는 삶'을 숙명으로 안고 살아가려는 '분단 부역자'가 늘어나는 2022년 2월이다. 통일 순례자의 발걸음이 무거워진다.
https://www.mk.co.kr/premium/special-report/view/2022/02/31487/
동서독 접경선 1393㎞를 달리다 보면 작으나 의미 있는, 이름 없으나 이름이 있어야 하는 기념물들을 만난다. 무명용사의 묘비를 본 듯 반갑기도 안타깝기도 하다. 만든 마음과 손길에 감사하며 잠시 숨을 고른다.
◆프레디의 접경탑
▲ 사진=손기웅
넓은 벌판을 지키듯 콘크리트 감시탑이 우뚝 서있다. 4x4 지휘용이다. 문은 닫혔으나 소유자의 이름과 주소, 일반전화·휴대폰 번호까지 자세히 적어놓았다. 관람을 원하면 언제든 연락하라는 의도다.
뒷마당에는 터무니없이 큰 탁자와 의자, 오토바이를 나무와 폐자재로 만들고 목장 출입문인 양 나무 문을 세우고 '프레디의 접경탑(Fredi's Grenzturm)'이라고 적었다. 분단의 아픔이 상상 이상으로 컸다는 것일까, 통일의 축복이 얼마나 큰지 보여주려는 것일까. 기어올라 그 뜻을 이리저리 재 본다. 결코 돈이 되지 않을 과거에 돈을 들이고 새 옷을 입혀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고 미래를 생각하게 하는 의식(意識)과 수준이 부럽다.
비무장지대(DMZ) 내에 남북이 구축한 전초기지(Guard Post), 그중 하나라도 반성과 이음과 다짐의 장소로 만들어 문을 열 그날을 그려본다. 군사적 필요에 의해 주위의 봉우리를 압도하고 계곡을 부라리며 감시하는 양측 최전방 군사기지를 언젠가는 인간 간, 인간과 자연 간의 평화를 체험하는 공간으로 탈바꿈해 보려는 꿈이다.
◆자유의 빛 박물관
▲ 사진=손기웅
시골길에서의 과속을 꾸짖듯 급히 멈추게 하는 철조망이다. 조그만 공간에 있을 것은 다 있다. 철조망 장벽, 둘러쳐진 전기선, 군견집과 감시 벙커, 차량방벽, 살인기계 자동발사장치 SM-70, 동독 국경표식지주와 국경표지판을 압축적으로 전시했다.
안내판에는 'Freilichtmuseum'이라고 적혀 있다. '야외박물관'으로 번역되지만, 'Freilicht'를 직역해 '자유의 빛'이나 '자유의 빛 박물관'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조성한 분들도 그러했으리라 짐작해 본다. 자유를 막고자 동독이 설치했던 죽음의 장치가 자유의 빛이 되어 자유를 상징하게 된 아이러니이자 은유(隱喩)다.
◆1989년 12월 21일 오전 8시
▲ 사진=손기웅
독일의 지리적 특징은 남쪽 알프스 지대를 제외하고는 산이 없다는 점이다. 지난 방문지 브로켄산만 예외다. 넓은 들판과 얕은 구릉이 펼쳐지고, 접경선 1393㎞를 달리는 동안 단 하나의 터널도 만나지 못한다.
속도 무제한 '아우토반(Autobahn)'을 질주하다 국도로 구불구불, 철마다 다른 빛을 뽐내는 밀과 호프의 벌판, 붉은 지붕지붕의 중세가 현대에 녹아든 아기자기한 동네 구경은 독일의 낭만이다. 여기에다 조그맣고 조금은 낡은 식당에서 그야말로 푸짐한 양에 넉넉한 정성이 담긴 향토음식에 곁들인 '스원한' 동네 산(産) 맥주는 분단과 통일로 벅찬 머리를 제대로 추스르게 한다.
진짜 이름이 없다. 도로변에 "이곳은 독일과 유럽이 1989년 12월 21일 오전 8시까지 분단되었다"고 쓰인 지도안내판이 서 있고, "1989년 12월 21일의 접경선개방을 기념하며"라고 새겨진 비석이 세워져 있다. 베를린장벽이 무너지고도 42일이나 닫혀 있었으니 그 속 탔던 마음의 발로였을까.
비석 한쪽에는 동독 국경표식지주가, 다른 편에는 유럽에 드리워졌던 '철의 장막(iron curtain)'을 따라 세운 '철의 장막 흔적(Iron Curtain Trail: ICT) 13' 표식기둥이 있다. 이 기념물 이름을 '통일 염원자'의 권한으로 '1989년 12월 21일 오전 8시'라고 명명했다.
참고로 'EuroVelo 13(EV13)'으로도 불리는 ICT 13 표식은 북극 바렌츠해에서 남쪽 흑해까지 전체 길이 7650㎞에 걸쳐 세워졌다. 지금의 '유럽 그린벨트(European Green Belt)'이기도 하다.
'EuroVelo'는 유럽에서 의미를 가지는 지역, 상징을 초국경으로 연결한 네트워크를 말한다. 'EuroVelo 1'은 '대서양 연안 길(Atlantic Coast Route)'이고, 가장 최근의 'EuroVelo 19'는 강변을 따라 만든 '뫼즈 사이클 루트(Meuse Cycle Route)'다.
분단도, 냉전도 이곳에는 지난 세기의 역사이자 기념물이 되었다. 새 세기에 강산이 두 번이나 바뀌어도 우리의 분단과 냉전은 여전함을 넘어 더욱 고착되어 간다. 분단에 적응하고 순응하며, 분단 속 '한 발로 뛰어야만 하는 삶'을 숙명으로 안고 살아가려는 '분단 부역자'가 늘어나는 2022년 2월이다. 통일 순례자의 발걸음이 무거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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