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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에서 백두산까지 - 33] "눈을 부라린 방앗간 아힉스펠트 타이스퉁겐" (매경 프리미엄, 20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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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2,442회 작성일 22-02-16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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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에서 백두산까지 - 33] "눈을 부라린 방앗간 아힉스펠트 타이스퉁겐" (매경 프리미엄, 2022.02.14)

https://www.mk.co.kr/premium/special-report/view/2022/02/31513/


아힉스펠트(Eichsfeld)는 서독 니더작센과 동독 튀링겐 주에 걸치고 남서쪽으로는 서독 헤센 주에 맞물리는 약 1,540㎢의 군이다. 전쟁이 끝나면서 분단되어 작은 부분은 영국군이, 큰 부분은 소련군이 점령하였다. 제한적이나마 오가던 교류는 1949년 양 독일이 건국하면서 어려워졌고, 1952년과 1961년 동독이 통제를 강화하자 끊어졌다.

1972년 동서독 '기본조약' 체결 이후 소규모지만 상호 왕래가 가능해지면서 동독은 아힉스펠트를 가르는 접경지 타이스퉁겐(Teistungen)에 접경통과검문소를 세웠다. 니더작센의 두더슈타트(Duderstadt)와 마주보는 곳으로 타이스퉁겐의 배후 도시인 보르비스(Worbis)를 연결하는 통과지점이기 때문에 흔히 '두더슈타트-보르비스 접경통과검문소'라 부른다. 1973년 7월 21일 공식 개통되어 1989년까지 약 600만명이 통과소를 왕래할 만큼 규모가 커졌다.

베를린장벽 붕괴 소식이 즉시 전해지자마자 11월 9~10일 밤사이 이곳도 개방되었다. 1990년 7월 1일 동서독 간 '화폐·경제·사회통합협정'이 발효되자 접경통과검문소로서의 임무는 마침내 종료되었다.


▲ 1988년 아힉스펠트 접경통과검문소 상황, 앞쪽에 통과소의 상징인 동독 국장이 들어간 흰색 탑이 서있다. 우측 5층 건물은 검문소의 지휘통제 및 감시용으로 인근 수도원에서 사용하던 방앗간 건물을 활용하여 ‘방앗간탑(Mühlenturm)’으로 불리었다. 뒤쪽 건물들이 현재 박물관으로 조성되었다. / 사진=손기웅

▲ 1989년 11월 9일 베를린장벽이 열리자 아힉스펠트도 열렸고, 그해 크리스마스 접경선을 넘어 동서가 함께 어우러졌다. / 사진=손기웅·강동완


▲ 1990년 4월 25일 아힉스펠트장벽을 동서독이 함께 제거하였다. 철조망 조각이 20M(동독마르크)에 거래된다는 당시 신문보도 / 사진=손기웅


'아힉스펠트 타이스퉁겐 접경박물관(Grenzlandmuseum Eichsfeld Teistungen)'은 접경통과검문소를 개조해 만들었다. 분단 시기의 애환을 담아 1995년에 문을 열었다. 약 1000㎡ 크기의 박물관 내부에는 독일 분단, 동독 사회상, 동독 접경지역 감시체계, 그리고 그뤼네스 반트에 관한 정보가 전시되어 있다.

박물관 주차장에는 "아힉스펠트는 1945년부터 1989/90까지 분단되었으나, 결코 분리되지 않았다"는 기념석이 1994년 세워졌다.


▲ 아힉스펠트 타이스퉁겐 접경박물관 전경


▲ 아힉스펠트는 결코 분리되지 않았다. / 사진=손기웅

◆TV, 혁명의 촉매

분단 시기 동독 주민이 서독의 TV방송 가운데 가장 큰 관심을 가졌던 것은 풍요로운 생활상이었을 것으로 생각했다. 통일 이후 조사를 통해 동독 주민이 가장 선호했던 서독의 프로그램은 시사토론과 뉴스였다. 사실을 왜곡하는 동독이 아니라, 서독 방송을 통해 자국과 외부의 상황을, 진실을 알고자 했다.


▲ 동독 어느 가정이 시청했을 TV / 사진=강동완

◆사회주의 줄서기

전시물 가운데 동독의 다양한 생산품이 눈에 띈다. 식료품, 생필품, 공산품의 전시 뒤로 과일을 사기 위해 긴 행렬을 진 동독 주민의 사진이 소위 사회주의 제1의 경제강국 동독의 현실이었다. 물품들에 동독 주민이 쉽게 다가갈 수 있었다면 평화혁명이 지체되었을지도 모른다.


▲ Made in DDR, Reality in DDR / 사진=손기웅·강동완

◆동독으로 선물을

'기본조약'이 체결되면서 주민 상호 방문이 가능해졌다. 서독 주민의 동독 친지 방문이 주를 이루었고, 서독산(産) 선물이 큰 환영을 받았다.

1980년대 중반에는 선물을 직접 들고 가지 않아도 되었다. 서독 주민은 동독으로 선물이 가능한 상품카탈로그를 보고, 선물을 골라 그 금액과 수수료를 서독 은행에 입금하면서 동독 수취인의 이름과 주소를 자세히 기록한다. 그 계좌는 동독의 것으로 동독은 2주 내에 수취인에게 통고하고 선물교환권을 주면, 수취인은 동독 면세점인 'Intershops'에서 선물을 받는다.

시간이 갈수록 선물이 다양해져 통일 직전에는 카탈로그가 200페이지를 넘었다. 37DM(서독마르크)짜리 식료품에서 TV 등 공산품은 물론 조립식 집까지 선물이 가능했다.


▲ 1987년 8월 발간된 ‘동독으로 선물을(Geschenke in die DDR)’ 카탈로그 / 사진=손기웅

◆6·25전쟁과 서독 재무장

1949년 서독은 국가를 세웠으나 군대가 없었다. 어느 국가도 서독의 재무장을 원하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저 멀리 한반도에서 전쟁이 터졌다. 서독은 공산주의 침략이 유럽에서도 일어날 것으로 보고, 미국을 포함한 서방연합군과 자국민에게 재무장 필요성을 역설했다. 1950년 동독이 약 8만명의 무장병력을 보유하였고, 여기에 약 40만명의 소련군이 동독에 주둔한 사실도 설득에 한몫했다.

1951년 3월 16일 서독은 우선 경찰특별부대 형식으로 연방접경수비대(Bundesgrenzschutz: BGS)를 창설했다. 경계선을 불법적으로 넘거나 범법행위로부터 접경지역의 안전을 지키는 것이 임무였다.

'한국전쟁과 재무장'이란 제목의 전시물에는 지도상에 BGS의 주둔지를 표시하였다. 서독 재무장이 6·25전쟁과 직접적 연관이 있는 만큼 아래에는 한반도 어느 전쟁터에서 부서진 소련제 T-34 탱크 옆을 달리는 유엔군 지프, "영웅적으로 싸우고 있는 한국민을 위해 기부하자"는 동독 포스터를 함께 담았다. 포스터에는 "한국은 한국인에게 독일은 독일인에게(Korea den Koreanern! Deutschland den Deutschen!)"라 적혀 있다.


▲ 6·25전쟁과 재무장 / 사진=손기웅

◆당의 칼과 방패

동독 비밀경찰 슈타지(Stasi)는 전 주민을 감시하고 감청하고 통제했다. 누구도 피할 수 없었다. 그 현실의 일단을 2006년 독일 영화 '타인의 삶(das Leben der Anderen)'이 보여준다. 슈타지를 국가 안보를 위한 '공산당의 칼과 방패(Schild und Schwert der Partei)'라 선전했다.


▲ 베를린장벽 붕괴 당시 동독 전역의 슈타지 사무소 현황과 영화 ‘타인의 삶’ 포스터 / 사진=손기웅


▲ 박물관 지하에 원형으로 보존된 슈타지 감금실 / 사진=손기웅

야외전시장은 민주주의와 생태계가 주제이다. 동독 독재체제를 고발하고 자연과의 화합을 교육하고자 한다. 벌판에는 당시 사용되었던 접경지역 장애시설물이 원형 그대로 놓여 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잇는 역사와 체험의 산교육장이다. 니더작센과 튀링겐주의 접경선을 따라가며 약 6㎞의 산책길이 그뤼네스 반트 내에 형성되어 있다.


▲ 동독군이 눈을 부라렸던 방앗간감시탑 꼭대기 4면 창에서 바라본 풍경, 접경통과검문소의 상징인 흰색 탑을 국장을 빼고 이곳으로 옮기고 그 상공을 날았을 서독 BGS 헬기를 함께 했다. / 사진=손기웅

▲ 자연의 일부가 된 코론넨벡 / 사진=손기웅

◆서독 접경표지판

접경지역을 찾는 방문객을 위해 서독은 "저 너머 사람들은 적이 아니다. 그들도 우리와 같은 독일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독군은 접경선을 넘을 경우 처벌하거나 총을 쏘도록 받은 명령을 따를 것이다. 접경지역에 무단으로 들어가지 말고 공식 도로만 이용할 것을 권한다"는 표지판을 세웠다.


▲ 서독 접경지역 안내 표지판 / 사진=손기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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