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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에서 백두산까지 -23] "'유럽 들판' 뵈크비츠-치헤리 접경박물관" (매경 프리미엄: 202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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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2,348회 작성일 22-02-03 2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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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에서 백두산까지 -23] "'유럽 들판' 뵈크비츠-치헤리 접경박물관" (매경 프리미엄: 2021.12.06)

https://www.mk.co.kr/premium/special-report/view/2021/12/31189/

1989년 11월 18일 오전 6시, 서독 니더작센주 치헤리(Zicherie)와 동독 작센안할트주 뵈크비츠(Böckwitz)를 막았던 장벽도 무너졌다. 베를린장벽이 열린 지 9일 만이었다. 더 이상 보고 싶지도 기억하고 싶지도 않은 분단의 흔적을 지우는 데 동서쪽이 따로 없었다.

통일 후 이곳을 '유럽 들판(Europawiese)'으로 이름 지었다. 분단 접경지역을 돌아보며 통한의 역사적 현장을 체험하도록 만든 이 공간을 '독일 들판'이라 부르지 않은 것은 동서독의 통일이 독일만이 아니라 유럽 전체의 축복이라는 의미를 담고자 했기 때문이다.

▲ 유럽 들판이 된 ‘철의 장막’ 한 조각 / 사진=손기웅

시간이 흐르며 주민들은 생각하고 깨달았다. 깊은 반성은 눈에 보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역사적 유물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농장 건물의 일부분을 수리하여 실내 박물관을, 뵈크비츠-치헤리 접경선을 따라 야외 접경탐방로(Grenzlehrpfad)를 만들어 1997년 개장하였다.

▲ 뵈크비츠-치헤리 야외 접경탐방로 / 사진=강동완

갈라졌던 두 마을의 아픈 역사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약 3.4㎞에 이르는 접경탐방로에는 철조망과 강철철조망장벽, 목책장벽과 콘크리트장벽, 콘크리트감시탑, 순찰로, 차량방벽, 발자국탐지지대 및 지뢰지대 등이 전시되어 있다.

특히 이곳에는 시대별로 변화된 장벽 모습을 자세히 보여준다. 전쟁이 끝나자마자 동독은 도로를 차단했고, 1952년부터 접경선을 따라 폭 10m의 통제지대를 만들었다. 처음에는 3m 높이로 목책을 세우더니 베를린장벽이 세워진 1961년 8월부터 이중철조망이 설치되었다. 그 사이에는 지뢰 등 각종 장해시설물이 부설되었고, 1968년에는 강철장벽으로 바뀌었다. 1979년 7월부터 살인기계 자동발사장치 SM-70이 설치되었고, 그 앞쪽으로 콘크리트장벽이 들어섰다.

▲ 동독의 분단 장벽 강화사(强化史) / 사진=손기웅

콘크리트감시탑이 콘크리트장벽을 마주 섰다. 탑은 높이가 약 15m이지만, 실제 밖으로 드러난 높이가 9m이기 때문에 'BT-9'이라 불린다. 1979년 5월에 세워진 이와 같은 감시탑을 동독은 1970년대 말에서 1980년대 초에 집중적으로 만들었다. 4층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건물의 대지면적은 약 17㎡, 공간 규모는 약 204㎥로 일반용(2m×2m)보다 규모가 큰 지휘용이다. 사방을 감시할 수 있는 창문이 있고 통신시설, 서치라이트, 침상 등이 갖추어졌다.

▲ BT-9를 감시벙커가 보좌하고 있다. / 사진=손기웅

▲ 통일 공간에서 수상 헬무트 콜과 멋진 듀오(duo)를 이루었던 외무상 한스-디트리히 겐셔가 1998년 8월 26일 필자가 선 곳을 방문하여 기념식수를 하였다.

▲ 너른 들판에 한 무더기의 돌이 쌓였다. 분단의 잔해다. 죽음의 장벽으로 막아섰던 회색 콘크리트를 이제 초록의 생명이 품었다. / 사진=강동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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