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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에서 백두산으로-10] "베를린 통일휴게소" (매일경제, 2021.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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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2,328회 작성일 21-11-04 1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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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에서 백두산으로-10] "베를린 통일휴게소" (매일경제, 2021.09.06)

https://www.mk.co.kr/premium/special-report/view/2021/09/30749/

45년 분단과 통일 31년, 독일 사례의 의미와 시사점 10선을 정리해 보았다. 베를린에서 백두산으로, 발로 뛰는 통일 여정에서 다섯 개의 휴게소를 중간중간에 만들어 숨을 고르기로 한다. 구동서독 접경선 1393㎞ 종주를 위해 베를린을 떠나며 1차 휴게소에 들른다.


1. 독일문제(German Question)와 독일문제(German Problem)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전승 4국(미국·영국·프랑스·소련)은 독일을 분할·점령하였고, 독일의 분단과 분단의 소멸에 관해 국제법적 권리를 가졌다. 독일은 동서로 나뉘어 동독은 소련이, 서독은 미·영·프가 점령했다. 수도 베를린 역시 동서로 나뉘어 동베를린은 소련에 의해, 서베를린은 미·영·프에 의해 점령되었다. '독일문제'가 잉태한 것이다.

독일문제로 표현되는 독일분단의 문제에는 상반되는 두 가지 의미가 동시에 함축되어 있었다. 분단 이후 독일국민의 대다수에게 있어서 독일문제란 'German Question'을 의미하였고, 그것에 관한 다양한 견해 속에서도 공통분모는 독일민족을 어떻게 하나로 합칠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반면에 독일 이웃 국가들의 대다수 국민에게 있어서 독일문제는 'German Problem'을 의미하였으며, 그 주요 인식은 어떻게 하면 독일의 분단을 지속시킬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분단기간 전승 4국이 독일의 분단에 관해 견지한 입장은 다음과 같다. 첫째, 독일은 언젠가는 통일될 것이다. 둘째, 그 방식은 '민족자결권'의 행사에 의한다. 셋째, 그러나 독일의 통일은 "정치적 현안은 아니다(not current issue)". 동서가 대립하는 가운데 소련은 동독을, 미·영·프는 서독을 확고하게 통제할 수 있다는 판단 아래 전승 4국이 독일통일에 관해 행한 립서비스였다.

전승 4국을 포함하여 유럽의 모든 국가들은 독일의 통일로 인해 유럽의 기존질서가 흔들리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특히 '제2의 라인강의 기적'을 실현하고 있었던 1989년 당시의 막강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통일 이후 강력한 군사력을 건설하고, 유럽의 중부에 위치한 지정학적인 이점을 활용하여 동서 양쪽으로 팽창하는 독일의 모습은 그들로서는 생각조차 하기 싫은 환영(幻影)이었다. 군국주의적 국가의 발전과정, 1차 및 2차 세계대전과 국가사회주의자(Nationalsozialist), 즉 나치를 체험한 그들로서는 프로이센-독일의 유령을 쉽사리 떨쳐버릴 수 없었던 것이 당연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를린장벽이 무너졌다.


2. '통일'보다 '통합'에 초점을 둔 서독의 외교

패전국인 서독은 전쟁 도발의 과오를 벗고 국제사회의 일원이 되기 위해 모든 주변 국가와 우호 관계를 증진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어느 한쪽만을 택하는 'entweder-oder'가 아니라 양쪽 모두를 향하는 'sowohl-als-auch' 외교정책이 필요하다는 인식을 정부 수립 이후 한 번도 잊어본 적이 없었다.

서독은 통일도 미·소 간, 서방과 동방 간의 화해·협력 속에서만 가능하다고 판단하고, 국가를 성장시킴과 동시에 통일에 유리한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통합정책(Integrationspolitik)'을 추진했다. 통합정책은 분단부터 통일에 이르기까지 세계 정세의 변화에 따라 3단계로 구분·추진됐다.

먼저 미·소가 대결했던 냉전의 시기에는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철저한 '서방통합정책(Westintegrationspolitik)'을 통해 건국, 군사적 재무장과 NATO 가입, 경제성장('마셜플랜'에 의한 지원을 바탕으로 '라인강의 기적')을 이룩함과 동시에 서방으로부터 신뢰를 획득했다.

 
▲ 분단 이후 서독이 가장 역점을 둔 프랑스와의 관계, 독·프 우호협력조약 10주년과 25주년에 발행한 초일봉피(初日封皮), 양 국기를 하나로 만들고 함께한 아데나워와 드골 / 사진=손기웅


▲ 서방통합의 상징이자 유럽연합(EU)의 출발인 ‘유럽석탄철강공동체(ECSC)’ 기념 초일봉피(初日封皮) / 사진=손기웅

다음으로 미·소가 화해했던 긴장완화의 데탕트시기에는 '신동방정책(Neue Ostpolitik)'을 기조로 하는 '동방통합정책(Ostintegrationspolitik)'을 추진했다. 1971년 소련 및 폴란드와 우호조약을 체결하고, 동구권과의 관계 개선을 통해 동구의 거대한 시장을 획득함과 동시에 1972년 동독과 기본조약을 체결했다. 또한 동서 간 해빙의 분위기 속에서 1975년 '헬싱키최종의정서'를 통해 출범한 '유럽안보협력회의(CSCE·현 유럽안보협력기구)'의 촉매 역할을 했다.

1979년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계기로 시작된 신냉전의 시기에는 다시 서방통합을 중점으로 하되 CSCE를 통해 동구권과 간접적 협력을 지속하는 '균형정책'을 추진했다. CSCE를 무대로 유럽에서의 정치력을 발휘하면서 경제력을 바탕으로 동독 및 동구권과의 관계를 유지했다.

결국 서독은 국제정세의 가파른 변화 속에서 현실적, 능동적으로 대응하는 통합정책을 통해 국력을 증대시키고, 동서방 양 진영에 서독이 과거의 파쇼국가가 아니라 함께 평화적으로 공동 번영할 수 있는 훌륭한 동반자란 인식을 심어주면서 통일에 우호적인 분위기를 조성해 나갔다.

통합정책의 기반은 미국과의 굳건한 동맹관계이다. 서독은 미국의 힘을 인정하고, 미국이 전개하는 세계전략의 틀을 거스르지 않고 편승하면서 국가이익을 이끄는 현실적 실익정책 'Realpolitik'을 추진하였다.

냉전 시기에는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서방통합의 첨병으로 역할하면서 경제 및 군사력을 배양하였다. 데탕트 시기에는 미국의 지지 아래 동구 사회주의국가 및 동독과의 관계를 개선하고 베를린문제를 해결하였다. 1948~1949년 소련과 동독이 서독에서 서베를린으로 연결되는 철도·도로를 차단하면서 발생한 베를린문제는 1972년 전승 4국 간 '베를린협정'이 체결되면서 해결되었다. 미국이 소련을 설득하고, 소련이 동독을 설득하여 체결된 동 협정으로 서독과 서베를린 간 통행이 보장된 것이다.

한편 신냉전의 시기에 서독은 다시 한번 대공산권 방위의 전초기지 역할을 하면서, 미국의 동의 아래 CSCE를 무대로 동독 및 동구 사회주의국가와의 관계를 지속하였다. 그리고 그 연장선에서 통일 가능성이 도래한 순간, 미국의 지지를 통일의 밑거름으로 삼았다.


▲ 독일 통일이 유럽통합과 함께 진행되었음을, 통일독일이 유럽통합의 기관차 역할을 할 것임을 보여주는 통일 8주년 기념 초일봉피(初日封皮), 독일국기 3색으로 쓴 유럽(EUR)과 무너진 베를린장벽 위로 별이 된 유럽 / 사진=손기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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