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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에서 백두산으로 - 7] " ​베를린 하늘다리 (하)" (매일경제, 2021.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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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2,314회 작성일 21-08-18 1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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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에서 백두산으로 - 7] " ​베를린 하늘다리 (하)" (매일경제, 2021.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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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9월 9일 로이터 시장이 제국의사당(Reichstag)에서 우리는 우리의 의무를 다할 것이다, 세계 모든 시민도 베를린을 지키기 위한 의무를 다해달라고 호소할 때 모인 서베를린 시민, 폐허의 당시 베를린 / 사진=picture-alliance/akg-images

공수량은 급증했지만 여전히 겨울이 문제였다. 연합국과 서베를린 시민의 의지가 하늘에 전해졌던지 참으로 다행스럽게 1948~1949년 겨울은 유난히 포근했다. 그럼에도 70%가 무거운 석탄이었다. 무게를 줄이기 위해 가루우유, 마른 과일과 채소가 공수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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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내에 실리고, 준비를 기다리는 지원물품 / 사진=dpa, KPA

모든 지원 물자가 서독에서 서베를린으로 바로 간 것은 아니다. 전쟁 직후 어려운 상황이었던 서쪽에서 물자를 확보할 수 없었기 때문에, 대부분 미국에서 서쪽으로 먼저 공수돼야 했다. 미국→서쪽독일→서베를린의 대륙 간 하늘다리가 만들어졌다.

당시 기종(機種)으로 독일 직항이 불가능했기에 중간 기착이 필요했다. 그린란드가 그 역할을 맡았다. 소량의 서베를린 생산품이 서쪽으로 오기도 했는데, 물품에는 '봉쇄된 베를린 생산(Hergestellt im Blockierten Berlin)' 표식이 붙여졌다.

소련은 당황했다. 봉쇄가 길어짐에 따라 소련은 물론이고 동베를린도 어려움에 부딪혔다. 연합국과 서베를린 시민의 결연한 의지, 새로운 전쟁 발발 가능성의 위험, 서방의 고부가가치 기술과 자본 이전의 차단으로 인한 경제적 곤란 등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소련은 1949년 5월 11일 자정 직전에 서베를린에 대한 전기 공급을 재개했고, 12일 0시 1분을 기해 서베를린으로 연결되는 모든 통로를 개방했다. '베를린 봉쇄(Blockade Berlins)'가 끝났다.

그럼에도 공수는 양은 줄었지만 지속됐다. 소련이 어떻게 변심할지 모른다는 우려에 서베를린 생필품 비축량이 두 달에 달할 때까지 하늘다리가 열렸다. 마침내 1949년 9월 30일 서방연합군은 역사상 최대의 공중작전을 끝냈다.

1948년 6월부터 총 210만t의 물자가 공수됐다. 약 10t의 지원품을 실은 수송기가 3분마다, 시작부터 마치는 날까지, 여름 가을 겨울 봄 여름 가을, 밤낮없이 하루 종일 실어나른 양이다. 1949년 4월 15~16일 부활절 기간에는 특별공수 '부활절 행진(Oster-Parade)'이 전개됐다. 24시간 동안 수송기 1398대가 1만2849t을 공수해 세계 기록을 세웠다. 거의 1분당 10t을 실은 공수기 1대가 출격한 셈이다.

공수 기간 중 하늘과 땅에서는 여러 불행한 일이 발생했고, 인명 피해도 미국, 영국, 독일 등 수백 명에 달했다. 소련의 방해도 있었다. 수송기가 소련 점령지, 즉 동쪽독일 상공을 지날 때 전투기가 위협비행을 하거나 대공포를 쏘았다. 서베를린에서는 소련의 사주를 받은 태업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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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를 위한 희생 / 사진=picture-alliance/akg-images

사탕, 초콜릿, 껌 등을 잔뜩 실은 일명 '사탕폭격기(candy bomber)'가 공중에서 서베를린 아이들에게 선물을 떨어뜨렸다. 크리스마스 전야에 서베를린 시민이 크리스마스 빵에 사용할 건포도는 일명 '건포도폭격기(Rosinenbomber)'가 날랐다. 크리스마스에는 수송기가 공중에서 산타클로스가 되어 선물을 뿌렸다.

사생결단의 혈투가 한반도에서 벌어지고 있던 1951년, 서베를린 시민은 자유의 통로 하늘다리에 대한 감사와 희생자에 대한 애도의 마음으로 템펠호프공항 앞에 기념비를 세웠다. 함부르크, 프랑크푸르트, 프리거호르스트 파스베르크, 가토프 등에도 기념물과 박물관이 마련됐다.

1959년 베를린 하늘다리 10주년을 맞아 서베를린 시장이 된 빌리 브란트는 희생자 가족을 지원하기 위한 '하늘다리 감사재단(Stiftung Luftbrückendank)'을 설립했다. 재단은 지금도 하늘다리와 베를린 봉쇄를 주제로 한 창의적인 사업을 지원하고 있다.

하늘다리 15주년을 맞아 1963년 6월 26일 존 F 케네디 미국 대통령이 서베를린을 방문했다. 지난 회에 언급한 "나도 베를린 시민입니다(Ich bin ein Berliner)" 연설을 하기 전에 케네디는 하늘다리를 진두지휘한 루셔스 클레이 장군을 서베를린 시민에게 먼저 소개해 열렬한 환영을 받도록 했다. 필자의 칼럼 "김여정에 '떼떼'로 비하된 문재인 정권, 체크포인트 찰리에서 배워라"(최보식의 언론·2021년 3월 18일)에는 케네디, 클레이, 서베를린의 인연이 잘 설명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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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단 시기 1974년 서독이, 1999년 통일독일이 발행한 베를린 하늘다리 기념 초일봉피(初日封皮) / 사진=손기웅

통일 이전 미군 주둔 지역에 위치한, 서베를린에서 가장 아름다운 거리 중 하나의 이름이 '클레이가(Clayallee)'다. 1994년까지 미군이 사용했던 길옆 극장과 도서관은 1998년 '연합군박물관(AlliiertenMuseum)'으로 단장돼 베를린 하늘다리의 역사를 보여주고 있다. 광장에는 당시 사용됐던 수송기가 통일 이후 옮겨진 베를린장벽, 동독의 콘크리트 장벽 감시탑, 동서 베를린 통과 지점에서 미군이 사용했고 많은 사연을 가진 '체크포인트 찰리(Checkpoint Charlie)' 검문소 실물과 함께 전시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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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연합군박물관 / 사진=손기웅

73년 전 서방연합국과 서베를린 시민의 결단, 의지, 희생, 인내로 자유가 지켜졌다. 공산주의에 의한 베를린 봉쇄는 적으로 싸웠던 미국과 독일이 하나가 되는 계기가 됐다.

서베를린 시민만 자유를 누린 것이 아니었다. 서베를린은 자유민주주의 전초기지가 되어 서독에 대한 동독 주민의 인식, 그들의 변화와 결단과 행동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동독 주민의 자유와 민족 통일로 연결됐다.

71년 전 우리 역시 유엔군과 함께 결단과 의지와 희생과 인내로 자유를 지켰다. 공산주의에 의한 남침은 점령국 미국과 대한민국이 하나가 되는 계기였다.

우리 선열은 물론이고 이국 땅에서 피를 흘리고 목숨을 바친 모든 분들께 감사하고 명복을 빈다. 이제 그 자유를 북한 주민도 누릴 수 있도록 해야 할 임무가 우리에게 남아 있다.

자유의 베를린 하늘다리는 서울을 거쳐 평양으로, 백두산으로 이어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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