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기웅의 통일토크] "'尹 대통령은 탄핵받을 일을 한 적이 없다', 그러나 국민 목소리에 반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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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240회 작성일 24-10-08 08:24본문
[손기웅의 통일토크] "'尹 대통령은 탄핵받을 일을 한 적이 없다', 그러나 국민 목소리에 반응해야 한다"(뉴스퀘스트, 2024.10.07)
https://www.newsquest.co.kr/news/articleView.html?idxno=232272
<사진> 1989년 10월 7일 동베를린에서 열린 동독 건국 40주년 기념 축하 행사[사진=dpa]
34년 전 1990년 10월 3일, 독일이 통일되었다. 일상이 된 통일, 통일날도 큰 국가적 행사 없이 조용하게 축하되었다. 그게 부럽다.
통일날보다 35년 전 오늘이 더 크게 다가오는 것은 국내 정국을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 그게 마음을 무겁게 한다.
1989년 10월 7일, 독일민주공화국(동독) 건국 40주년을 맞아 동베를린이 들썩였다. 꺾어지는 해를 기념하는 전통은 동서양에 차이가 없다.
프리드리히샤인에서 슈트라우스베르거 광장을 거쳐 알렉산더 광장까지 ‘카를 마르크스 대로’에는 기념 군(軍) 행진이 거창하게 펼쳐졌다. 핵무기만 빼면 평양 김일성광장에서 툭하면 볼 수 있는 광경과 다를 바 없었다.
오히려 더 화려했다. 김일성·김정일·김정은, 누구도 보여주지 못했던 연출을 당서기장 에리히 호네커가 해냈다. 내로라하는 사회주의 지도자 대부분을 연단에 세웠다.
자신의 우측으로는 명실상부 사회주의 최고지도자 소련의 미하일 고르바초프 당서기장을 필두로 보이치에흐 야루젤스키 폴란드 대통령, 니콜라에 차우체스쿠 루마니아 대통령 등이 그리고 멀리는 연형묵 북한 총리와 야세르 아라파트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PLO) 의장도 자리를 잡았다. 좌측으로는 동독의 정·군 실세들이 늘어섰다.
국가(國歌) ‘폐허에서 부활하여(Auferstanden aus Ruinen)’가 울려 퍼지고, 우렁찬 구령 속의 엄숙한 열병식에 이어 행진이 시작되었다. 각종 포와 탱크, 미사일 부대 등이 웅장하게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군악대 행진곡이 분위기를 북돋는 가운데 호네커는 앞을 지나는 군기·부대들에 거수경례로 군통수권자임을 과시했다. 관중들의 환호 함성이 추임새로 곁들여졌다.
밤에는 청년전위 ‘자유독일청년단(Freie Deutsche Jugend)’을 중심으로 십만 명이 넘는 횃불 군중시위가 다시 거리를 채웠다. 일렁이는 횃불 파도 앞에서, 등 뒤에서 탐조등 불빛이 자신을 비추는 가운데 호네커는 팔을 내지르며 외쳤다, “독일민주공화국은 수백 년을 지속할 것이다.”
10일 후 호네커는 권좌에서 쫓겨났다. 17일 ‘궁정 쿠데타’로 기습적으로 제안된 자신의 해임결의안에 자신도 손을 들어야만 했고, 다음날 18년 권력의 추락이 공식 발표되었다. 이틀 후 1963년부터 26년간 인민교육부장관으로 권세를 누렸던 부인 마곳 호네커도 쫓겨났다.
한달 이틀 후, 11월 9일 통한의 베를린장벽이 무너져 내렸다. 1년에서 4일 모자란, 1990년 10월 3일 동독은 소멸되고 독일이 통일되었다.
사실 10월 7일, 동베를린은 물론이고 동독 전역이 건국 40주년이란 공식 기념식이 아니라 다른 이유로 더 들썩였다. 고르바초프가 시작한 ‘페레스트로이카(개혁)’과 ‘글라스노스트(개방)’이 동독에도 전파되었으나, 요지부동 동독 지도부 때문이었다.
5월 7일 지방선거의 선거부정으로 촉발된 주민 시위는 독일 전역으로 번져 자유선거, 개혁, 여행의 자유, 민주주의를 외치는 시위대 함성이 나날이 높아졌다. 헝가리의 국경 개방(지난 칼럼 “헝가리와 중국의 다른 선택,” 2024.05.07 및 “세계사를 바꾼 ‘범유럽 소풍’,” 2024.08.26)을 기회로 동독 주민은 체코슬로바키아와 헝가리의 서독대사관에 난입했고, 이들이 오스트리아를 거쳐 서독으로 온 것은 물론이고 동독을 거쳐 서독으로 자유를 찾는 상황이었다.
축하차 고르바초프는 10월 5일 동베를린에 도착했다. 2박 3일 긴 일정을 잡은 그는 마음을 단단히 여몄다. 4개월 전 6월 4일 천안문에서와 같은 유혈진압이 다시 일어나서는 안 되기 때문이었다.
리무진이 지나는 시가지에는 수많은 동독 주민이 그를 환영했다. 창을 내린 고르바초프는 환한 미소로 손을 흔들며 화답했다.
다음날 ‘운터 덴 린덴’ 거리에 위치한 ‘노이에 바헤(Neue Wache)’, 파시즘과 군국주의에 항거하다 목숨을 잃은 무명용사 기념관에 아내와 함께 헌화한 고르바초프는 거리로 나섰다. 의도적으로 계산된 행동이었다.
언론·방송이 몰려들자 동독 기자들 대신 서독 ZDF(우리의 KBS2) 카메라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자신의 개혁정책을 설파했다. 당위성을 강조했다. 그의 통역이 ‘Umgestaltung’으로 번역한 개혁은 ‘환골탈태(換骨奪胎)’가 가장 적합한 의미다.
그러면서 계획된, 지난 칼럼(“고르바초프, 위대한 정치가·사상가·행동가,” 2024.09.02)에서 소개한 역사적 발언을 했다, “나는 삶에 반응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만 위험이 기다리고 있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삶에서 나오는 충격, 사회에서 나오는 충격을 받아들이고 그에 알맞게 정책을 수립하는 사람은 어떠한 어려움도 가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이 정상적인 현상입니다.”
고르바초프의 이 발언을 분명히 전해 들었을, 보았을 호네커가 이날 행하고 다음날 공표된 건국 40주년 기념사는 다음과 같았다. “이것만큼은 확실합니다. 우리에게는 동독 건국 시에 각인된 구호가 여전히 유효합니다. 전진뿐이다, 후퇴는 결단코 없다(Vorwärts immer, rückwärts nimmer).”
그리고 다음날 40주년 기념 주석단에 고르바초프를 세우고, 그 앞으로 군과 무기를 행진시키고, 함성·환호를 지르는 군인과 주민을 보여주면서 이렇게 속으로 외쳤을 것이다, “이게 내가 통치하는 독일민주공화국이야, 변화는 무슨 개뿔, 나는 내 쪼대로 내 길을 갈 거야.”
축하연회가 열린 저녁, 지금은 철거된 ‘공화국 궁전(Palast der Republik, 우리의 국회의사당)’ 주위, 슈프레강 건너 쪽 둔치와 다리에는 운집한 동독 주민이 외치는 “고르비 고르비” 함성이 하늘을 찔렀다.
자신에게 힘이 되어줄 것을 기대했던 호네커는 18시 30분경 단 둘이 있을 때 고르바초프로부터 전날과 동일한 말을 직접 들어야 했다. 서독 언론이 “삶에는 용기 있는 결정들이 요구된다. 너무 늦게 오는 자를 삶은 벌한다”로 정리·보도했다.
호네커의 정책엔 변화가 없었다. 모든 것을 엿들었고, 모든 것을 통제했다는 비밀경찰 슈타지(Stasi)에도, 억압에도 동독 주민의, 군인의 마음과 머릿속에 무엇이 열망되었는지 호네커는 결코 인정하지 않았다.
지지율 25%, 대한민국 대통령 윤석열이 임기 반에 받은 성적표다.
근본을 흔들어버린 문재인, 문 정권으로부터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을 다시 바로 세우겠다고 출사표를 던졌다. 국민 지지를 받았다.
북한의 위협 앞에 군사안보를 강화했다. 억제력을 확장했고, 10월 1일 국군의날 기념행진으로 이를 보여주었다.
여론조사에 95%가 주한 미군 전술핵무기 재배치를 찬성해도 이를 배제하고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과 ‘비확산조약(NPT)’ 체제를 존중하고 북핵 문제 평화적 해결을 노력하고 있다. 대북 국제제재를 여전히 작동시키고 있다.
남북관계의 정상화, 원칙에 입각한 대북정책으로 국민적 자존감을 세웠다. 비례성의 원칙으로 도발마다 대응해, 대북 확성기 전면 재개에도 김정은이 감히 총격을 가하지 못하고 있다.
단순한 ‘한반도 통일’이 아니라, 한·미·일 정상이 ‘한반도 자유·평화·통일’, 즉 우리식 통일방안에 합의하고 서명했다. 역대 어느 대통령도 해내지 못한 일이다.
북한 주민도 대한민국 국민이다, 그들의 삶과 인권 개선에 노력하겠다, 대한민국을 찾는 북한 주민은 단 한 사람도 돌려보내지 않겠다, 북한 주민이 외부 세계를 알도록 눈과 귀를 열어주겠다, 북한 주민 변화를 통해 통일을 이루겠다 등의 발언을 육성으로 공개적으로 계속한다. 역대 어느 대통령보다 가장 대한민국 대통령답다.
그럼에도 국민지지 25%는 너무 초라하다. 괄목할만한 성과를 인정해주지 않는 국민이 아무리 섭섭해도, 윤석열 대통령은 스스로를 돌아보아야 한다. 문제의 원인을 자신도 안다.
호네커가 그랬다. 문제도 알고 원인도 안다. 다만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문제를 직시하지 않았고, 반응하지 않았다.
리처드 닉슨 대통령은 냉전을 긴장완화로 바꾸고, 중국과 외교관계를 수립하고, 월남전을 끝내는 큰 전변을 이끌었다. 상대의 2배가 되는 압도적 다수의 지지를 얻어 재선에도 성공했다. 대외 정책적으로 거둔 업적에도 불구하고 그는 국내적으로 민주주의를 거스르다 권좌에서 물러나야만 했다.
윤석열 대통령의 임기, 이제 반이 남았다. 탄핵 받을 일을 한 적이 없다. 그럼에도 대한민국 대통령의 길을 다시 각오하고 걸어야 한다.
지금 국민 목소리에 반응해야 한다. 이미 늦었지만, 더 늦어서는 안 된다. 그것이 대한민국이, 자신도, 김 여사도 사는 길이다.
https://www.newsquest.co.kr/news/articleView.html?idxno=232272
<사진> 1989년 10월 7일 동베를린에서 열린 동독 건국 40주년 기념 축하 행사[사진=dpa]
34년 전 1990년 10월 3일, 독일이 통일되었다. 일상이 된 통일, 통일날도 큰 국가적 행사 없이 조용하게 축하되었다. 그게 부럽다.
통일날보다 35년 전 오늘이 더 크게 다가오는 것은 국내 정국을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 그게 마음을 무겁게 한다.
1989년 10월 7일, 독일민주공화국(동독) 건국 40주년을 맞아 동베를린이 들썩였다. 꺾어지는 해를 기념하는 전통은 동서양에 차이가 없다.
프리드리히샤인에서 슈트라우스베르거 광장을 거쳐 알렉산더 광장까지 ‘카를 마르크스 대로’에는 기념 군(軍) 행진이 거창하게 펼쳐졌다. 핵무기만 빼면 평양 김일성광장에서 툭하면 볼 수 있는 광경과 다를 바 없었다.
오히려 더 화려했다. 김일성·김정일·김정은, 누구도 보여주지 못했던 연출을 당서기장 에리히 호네커가 해냈다. 내로라하는 사회주의 지도자 대부분을 연단에 세웠다.
자신의 우측으로는 명실상부 사회주의 최고지도자 소련의 미하일 고르바초프 당서기장을 필두로 보이치에흐 야루젤스키 폴란드 대통령, 니콜라에 차우체스쿠 루마니아 대통령 등이 그리고 멀리는 연형묵 북한 총리와 야세르 아라파트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PLO) 의장도 자리를 잡았다. 좌측으로는 동독의 정·군 실세들이 늘어섰다.
국가(國歌) ‘폐허에서 부활하여(Auferstanden aus Ruinen)’가 울려 퍼지고, 우렁찬 구령 속의 엄숙한 열병식에 이어 행진이 시작되었다. 각종 포와 탱크, 미사일 부대 등이 웅장하게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군악대 행진곡이 분위기를 북돋는 가운데 호네커는 앞을 지나는 군기·부대들에 거수경례로 군통수권자임을 과시했다. 관중들의 환호 함성이 추임새로 곁들여졌다.
밤에는 청년전위 ‘자유독일청년단(Freie Deutsche Jugend)’을 중심으로 십만 명이 넘는 횃불 군중시위가 다시 거리를 채웠다. 일렁이는 횃불 파도 앞에서, 등 뒤에서 탐조등 불빛이 자신을 비추는 가운데 호네커는 팔을 내지르며 외쳤다, “독일민주공화국은 수백 년을 지속할 것이다.”
10일 후 호네커는 권좌에서 쫓겨났다. 17일 ‘궁정 쿠데타’로 기습적으로 제안된 자신의 해임결의안에 자신도 손을 들어야만 했고, 다음날 18년 권력의 추락이 공식 발표되었다. 이틀 후 1963년부터 26년간 인민교육부장관으로 권세를 누렸던 부인 마곳 호네커도 쫓겨났다.
한달 이틀 후, 11월 9일 통한의 베를린장벽이 무너져 내렸다. 1년에서 4일 모자란, 1990년 10월 3일 동독은 소멸되고 독일이 통일되었다.
사실 10월 7일, 동베를린은 물론이고 동독 전역이 건국 40주년이란 공식 기념식이 아니라 다른 이유로 더 들썩였다. 고르바초프가 시작한 ‘페레스트로이카(개혁)’과 ‘글라스노스트(개방)’이 동독에도 전파되었으나, 요지부동 동독 지도부 때문이었다.
5월 7일 지방선거의 선거부정으로 촉발된 주민 시위는 독일 전역으로 번져 자유선거, 개혁, 여행의 자유, 민주주의를 외치는 시위대 함성이 나날이 높아졌다. 헝가리의 국경 개방(지난 칼럼 “헝가리와 중국의 다른 선택,” 2024.05.07 및 “세계사를 바꾼 ‘범유럽 소풍’,” 2024.08.26)을 기회로 동독 주민은 체코슬로바키아와 헝가리의 서독대사관에 난입했고, 이들이 오스트리아를 거쳐 서독으로 온 것은 물론이고 동독을 거쳐 서독으로 자유를 찾는 상황이었다.
축하차 고르바초프는 10월 5일 동베를린에 도착했다. 2박 3일 긴 일정을 잡은 그는 마음을 단단히 여몄다. 4개월 전 6월 4일 천안문에서와 같은 유혈진압이 다시 일어나서는 안 되기 때문이었다.
리무진이 지나는 시가지에는 수많은 동독 주민이 그를 환영했다. 창을 내린 고르바초프는 환한 미소로 손을 흔들며 화답했다.
다음날 ‘운터 덴 린덴’ 거리에 위치한 ‘노이에 바헤(Neue Wache)’, 파시즘과 군국주의에 항거하다 목숨을 잃은 무명용사 기념관에 아내와 함께 헌화한 고르바초프는 거리로 나섰다. 의도적으로 계산된 행동이었다.
언론·방송이 몰려들자 동독 기자들 대신 서독 ZDF(우리의 KBS2) 카메라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자신의 개혁정책을 설파했다. 당위성을 강조했다. 그의 통역이 ‘Umgestaltung’으로 번역한 개혁은 ‘환골탈태(換骨奪胎)’가 가장 적합한 의미다.
그러면서 계획된, 지난 칼럼(“고르바초프, 위대한 정치가·사상가·행동가,” 2024.09.02)에서 소개한 역사적 발언을 했다, “나는 삶에 반응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만 위험이 기다리고 있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삶에서 나오는 충격, 사회에서 나오는 충격을 받아들이고 그에 알맞게 정책을 수립하는 사람은 어떠한 어려움도 가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이 정상적인 현상입니다.”
고르바초프의 이 발언을 분명히 전해 들었을, 보았을 호네커가 이날 행하고 다음날 공표된 건국 40주년 기념사는 다음과 같았다. “이것만큼은 확실합니다. 우리에게는 동독 건국 시에 각인된 구호가 여전히 유효합니다. 전진뿐이다, 후퇴는 결단코 없다(Vorwärts immer, rückwärts nimmer).”
그리고 다음날 40주년 기념 주석단에 고르바초프를 세우고, 그 앞으로 군과 무기를 행진시키고, 함성·환호를 지르는 군인과 주민을 보여주면서 이렇게 속으로 외쳤을 것이다, “이게 내가 통치하는 독일민주공화국이야, 변화는 무슨 개뿔, 나는 내 쪼대로 내 길을 갈 거야.”
축하연회가 열린 저녁, 지금은 철거된 ‘공화국 궁전(Palast der Republik, 우리의 국회의사당)’ 주위, 슈프레강 건너 쪽 둔치와 다리에는 운집한 동독 주민이 외치는 “고르비 고르비” 함성이 하늘을 찔렀다.
자신에게 힘이 되어줄 것을 기대했던 호네커는 18시 30분경 단 둘이 있을 때 고르바초프로부터 전날과 동일한 말을 직접 들어야 했다. 서독 언론이 “삶에는 용기 있는 결정들이 요구된다. 너무 늦게 오는 자를 삶은 벌한다”로 정리·보도했다.
호네커의 정책엔 변화가 없었다. 모든 것을 엿들었고, 모든 것을 통제했다는 비밀경찰 슈타지(Stasi)에도, 억압에도 동독 주민의, 군인의 마음과 머릿속에 무엇이 열망되었는지 호네커는 결코 인정하지 않았다.
지지율 25%, 대한민국 대통령 윤석열이 임기 반에 받은 성적표다.
근본을 흔들어버린 문재인, 문 정권으로부터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을 다시 바로 세우겠다고 출사표를 던졌다. 국민 지지를 받았다.
북한의 위협 앞에 군사안보를 강화했다. 억제력을 확장했고, 10월 1일 국군의날 기념행진으로 이를 보여주었다.
여론조사에 95%가 주한 미군 전술핵무기 재배치를 찬성해도 이를 배제하고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과 ‘비확산조약(NPT)’ 체제를 존중하고 북핵 문제 평화적 해결을 노력하고 있다. 대북 국제제재를 여전히 작동시키고 있다.
남북관계의 정상화, 원칙에 입각한 대북정책으로 국민적 자존감을 세웠다. 비례성의 원칙으로 도발마다 대응해, 대북 확성기 전면 재개에도 김정은이 감히 총격을 가하지 못하고 있다.
단순한 ‘한반도 통일’이 아니라, 한·미·일 정상이 ‘한반도 자유·평화·통일’, 즉 우리식 통일방안에 합의하고 서명했다. 역대 어느 대통령도 해내지 못한 일이다.
북한 주민도 대한민국 국민이다, 그들의 삶과 인권 개선에 노력하겠다, 대한민국을 찾는 북한 주민은 단 한 사람도 돌려보내지 않겠다, 북한 주민이 외부 세계를 알도록 눈과 귀를 열어주겠다, 북한 주민 변화를 통해 통일을 이루겠다 등의 발언을 육성으로 공개적으로 계속한다. 역대 어느 대통령보다 가장 대한민국 대통령답다.
그럼에도 국민지지 25%는 너무 초라하다. 괄목할만한 성과를 인정해주지 않는 국민이 아무리 섭섭해도, 윤석열 대통령은 스스로를 돌아보아야 한다. 문제의 원인을 자신도 안다.
호네커가 그랬다. 문제도 알고 원인도 안다. 다만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문제를 직시하지 않았고, 반응하지 않았다.
리처드 닉슨 대통령은 냉전을 긴장완화로 바꾸고, 중국과 외교관계를 수립하고, 월남전을 끝내는 큰 전변을 이끌었다. 상대의 2배가 되는 압도적 다수의 지지를 얻어 재선에도 성공했다. 대외 정책적으로 거둔 업적에도 불구하고 그는 국내적으로 민주주의를 거스르다 권좌에서 물러나야만 했다.
윤석열 대통령의 임기, 이제 반이 남았다. 탄핵 받을 일을 한 적이 없다. 그럼에도 대한민국 대통령의 길을 다시 각오하고 걸어야 한다.
지금 국민 목소리에 반응해야 한다. 이미 늦었지만, 더 늦어서는 안 된다. 그것이 대한민국이, 자신도, 김 여사도 사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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