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기웅의 통일토크] "파리 올림픽 '스포츠 반역자'는 누구?"(뉴스퀘스트, 2024.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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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577회 작성일 24-08-05 11:54본문
<사진> 파리올림픽 탁구 혼합복식 시상식에서 국산 스마트폰으로 셀피를 찍는 남·북·중 선수들 [사진=연합뉴스]
<사진> 2012년 7~8월 런던 소재 ‘독일역사연구소’에서 열린 ‘ZOV 스포츠반역자’ 전시회 포스터 [사진=Zentrum deutsche Sportgeschichte Berlin-Brandenburg e.V.]
[손기웅의 통일토크] "파리 올림픽 '스포츠 반역자'는 누구?"(뉴스퀘스트, 2024.08.05)
https://www.newsquest.co.kr/news/articleView.html?idxno=228753
‘헤염 녀자 100m 자유영’은 약과다. ‘물에뛰여들기 녀자 10m 고정판 동시경기’는 좀 난해하다. 각각 ‘수영 여자 100m 자유형’과 ‘다이빙 여자 싱크로나이즈드 10m 플랫폼’의 북한식 표현이다. 음식문화에 이어 언어에도 나타나는 다름이고 특히 전문분야일수록 커진다.
취재진과 환영객을 따돌리고 파리올림픽에 입성한 북한 선수들은 훈련 외 숙소에서 두문불출이다. 간혹 외국 선수나 관중과 교류하는 모습이 포착되지만, 외부 접촉을 최소화한다. 식사도 따로 한다고 한다.
특히 우리에게 그렇다. 탁구 혼합복식 시상대에서 남북 선수들이 함께 ‘셀피’를 찍기도 했지만 예외였다. 우리 선수 인사를 피하고, 우리 언론 질문에 묵묵부답이다. 무표정 무대응을 원칙으로 삼았다.
선수들의 외부 접촉·교류에 가지는 북한의 긴장이 그대로 느껴진다. 공식대표단은 21명이다. 다이빙·탁구·레슬링·수영 등 7개 종목 선수 16명, 북한 올림픽위원장인 체육상 김일국 단장과 체육계 인사를 더하면 21명이 찬다.
보안요원은 없는 걸까? 8년 만에 참가하는 올림픽에 선수단 규모를 최소화(2016년 리우올림픽에는 선수 31명, 임원 4명)한 것은 비용 줄이기에 더해 돌발 사태 ‘탈출’을 막기 위함일 것이다. 본국에서 추가로 파견했거나, 유럽 활동 요원들이 파리로 왔을 것이다.
사회주의 형제국 동독의 멸망을 가장 열심히 연구했을 북한이다. 동독 체육인의 서방 탈출 사례도 놓치지 않고 분석하고 예방책을 강구했을 것이다.
‘스포츠반역자(Sportverräter)’, 서방 국가로 탈출한 선수에게 찍은 동독의 낙인이다. 동독법에 의하면 ‘불법적 국경통과자’인 이들의 수는 1952년부터 1989년까지 최소 615명에 달했다고 비밀경찰 슈타지(Stasi)가 보고했다.
체육을 국가 및 체제 선전의 중요 도구로 이용한 동독은 엘리트 선수들을 국가적 차원에서 육성·관리했다. 국가대표선수들은 특권적 삶을 누리고, 좋은 환경에서 훈련하고 지원 받았다.
상대적으로 풍요했던 선수들이 동독을 떠난 이유는 다양했다. 서방에 눈을 뜬 일부는 동독에 만연한 정치·경제·사회적 상황을 더 이상 받아들일 수 없었다. 체제에 부정적 언행을 보였던 선수들은 재능 계발과 발전 기회로부터 배제되었다. 승리와 성과에 대한 높은 압박감도 작용했다. 당국은 지정된 목표가 달성되지 않으면 국가 지원을 줄이거나 중단하겠다고 위협했다.
1961년 베를린장벽이 건설되기 전에는 수많은 선수와 관계자, 관련 의사들이 동독을 떠났다. 헬무트 쇤 감독이 이끄는 축구팀 ‘SG 드레스덴-프리드리히슈타트’는 1950년 선수단 거의 전체가 서베를린으로 탈출했다.
쇤은 1974년 서독월드컵에 서독 국가대표팀감독으로 참가했다. 예선전에서 동독으로부터 일격을 당한 쇤은 대회 중간에 TV에 나와 서독 국민에게 사과해야 했다. 심기일전한 쇤은 주장 프란츠 베켄바워와 울리 회네스 등의 활약에 힘입어 서독에 두 번째 우승을 안겼다.
장벽이 세워지고 동서독 국경이 완전 차단되자 탈출은 선수 개인의 단독작전이 되었다. 절호의 기회는 서방 국가에서 열리는 대회 참가 때였다. 선수들은 경기 전, 도중, 후에 비교적 방해받지 않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탈출은 서독 선수는 물론이고 제3국 체육관계자의 도움으로 일어났다. 슈타지의 추적·탄압 가능성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그런 지원은 대부분 비밀로 유지되었고, 동독 공산주의가 몰락한 후에야 알려졌다.
저명 선수의 탈출은 동독 정부에 매우 불쾌한 일이었다. 이들은 ‘운동복을 입은 외교관’으로 역할하면서 동독의 국제적 명성을 높이는 데 도움을 주어야 했기 때문이다. 체제 내적으로 주민에게 미치는 악영향도 작지 않았다.
자국민의 해외 출입을 엄격히 통제한 동독은 슈타지에게 사업 및 목적에 따라 ‘비사회주의적 경제권(Nichtsozialistische Wirtschaftsgebiet)’으로 여행을 허용하는 대상자, ‘특별여행단(Reisekader)’을 선별·관리하도록 했다. 정부 또는 정당 관계자, 공적 활동가, 경제 관련자 등이 대상에 포함되었다. 슈타지 제19부가 관리한 Reisekader 규모는 약 4만 명에 달했다.
체육선수는 예술가, 학자, 시장과 함께 공적 활동가에 해당되었다. 슈타지는 선수의 발굴 초기부터 조사·감시·통제하면서 Reisekader 선정 여부를 결정했다.
‘스포츠반역’을 막기 위해 동독은 Reisekader에 속하는, 충분히 신뢰할 수 있다고 판단되는 선수들만 서방 국가, 특히 서독 개최 대회에 데려갔다. 그럼에도 선수들은 대회 기간 여권 등 개인 서류를 압수당했다.
1950년에 신설된 슈타지는 또한 바람직하지 않거나 의심스러운 개인·단체를 비밀조사·감시하는 ‘공작작전(Operativer Vorgang: OV)’을 진행했다. 대상자를 종합적으로 관찰하는 것뿐만 아니라 전화 도청, 서신 개봉, 자택 비밀 수색 등이 실행되었다. 가족, 친구, 직장 동료에 대한 감시도 당연했다. 조치가 필요한 경우에는 직업적 실패, 가정 파괴, 중상모략 등도 자행했다. 대상자를 아예 슈타지 요원으로 채용하려는 시도도 이뤄졌다.
시간이 갈수록 OV는 체계화되고 광범위해졌다. 체육선수, 민권운동가, 작가, 예술가 등 활동을 통해 주목 받은 수많은 사람들이 대상이었다. 1985년부터 1988년까지 슈타지는 매년 4,500~5,000건의 OV를 추진했다.
1970년대 초부터 슈타지는 포괄적인 감시체제 운영과 개별적 통제를 통해 동독 선수의 ‘공화국탈출’ 가능성에 예방적으로 대응하려 노력했다. 집중적으로 감시하는 이른바 ‘스포츠보안부(Sicherungsbereich Sport)’의 대상은 최고 기량의 선수 및 친구, 가족을 포함해 최소 10만명이었다. 이들을 감시하기 위해 약 3천명의 슈타지 비밀요원이 투입되었다.
슈타지는 또한 주요 스포츠반역자를 선정해 이들의 탈출 경위를 상세히 조사하고, 탈출 후 근황을 감시할 뿐만 아니라, 이들의 삶을 방해하고 다시 잡아오려는 ‘중앙공작작전(Zentraler Operativer Vorgang: ZOV)’을 시행했다. 통일 후 63건의 ZOV사례가 확인되었다.
탈출에 성공한 선수들은 정신적 고통을 겪어야 했다. 슈타지는 동독에 남은 가족과 친지들을 압박해 탈출선수들이 돌아오도록 설득하게 했다. 성공하지 못할 경우 보복했다.
친·인척들에게는 사회 체계로부터 소외시키려는 의도적인 감시·조작·명예 훼손 등 소위 ‘분해조치(Zersetzungsmaßnahmen)’가 행해졌다. 탈출선수도 예외가 아니어서 선수로서의 생명을 끊게 하려거나 생명 자체를 위협했다.
동독 언론들은 탈출선수를 ‘사회주의 이상에 대한 반역자(Verräter an den Idealen des Sozialismus)’로 낙인찍거나, ‘부도덕한 인신매매범의 피해자’로 묘사해 서독·서방의 책임으로 몰고자 했다.
당국은 이들이 대중의 뇌리에서 사라지게 노력했다. 참가했던 경기대회 목록·통계에서 이름이 삭제되고 사진들이 수정되었다. 탈출에 관해 당국이 함구하게 했던 상황에서 이 명령을 실행해야 했던 언론의 스포츠 편집부 직원들이 탈출을 가장 먼저 알아차린 경우가 많았다.
1989년 12월 ‘ZOV 스포츠반역자’ 최종보고서에 따르면 최소 615명의 선수, 감독·코치, 의사들이 서방으로 탈출했다. 분야도 축구, 사이클, 육상, 수영, 농구, 레슬링, 역도, 경보, 조정, 카누, 피겨 스케이팅, 아이스하키, 스키, 노르딕 복합, 루지(경주썰매) 등 다양했다.
경기력이나 체제 충성심 부족으로 해외 원정에 포함되지 않은 선수들은 고전적인 탈출 방법을 택해야 했다. 400m 이상 자유형 수영 부문 동독 챔피언 악셀 미트바우어는 1968년 부다페스트에서 열린 경기에 참가 중 서독 선수와 코치에게 어떻게 서독으로 탈출할 수 있는지를 물었다.
얼마 후 그는 슈타지에 체포되어 동베를린으로 압송되었다. 7주 동안 독방에 감금되어 심문 받은 그는 경기 참가와 체육시설 이용이 평생 금지되고, 슈타지의 특별감시대상이 되었다.
1969년 8월 17~18일 밤 악셀은 멋진 탈출에 성공했다. 그는 동해(Ostsee)에 몸을 던져 서독의 뤼벡까지 22㎞를 헤엄쳐 갔다.
2011년 7월 베를린 빌리 브란트 하우스에서는 ‘ZOV 스포츠반역자’를 주제로 15명의 주요 탈출선수에게 헌정된, 그들의 인생을 소개하는 전시회가 열렸다. 여기서 악셀은 그 밤은 ‘내 인생과의 경기’였다고 웃으며 술회했다. 전시회는 해외에서도 개최되었다.
스포츠 강국 동독은 건국부터 1989년 몰락 때까지 국제대회에서 4,000회 이상의 승리를 거두었고, 동독은 항상 메달 순위 상위 3분의 1에 들었다. 물론 여기에는 국가중요기밀산업으로 육성된 동독의 스포츠과학연구를 활용한 체계적인 도핑이 한몫했다.
레나테 포겔은 1955년 칼-마르크스 시에서 태어난 수영선수였다. 동독 챔피언은 물론이고 1972년 뮌헨올림픽에서 은메달을 획득하고, 1973년 베오그라드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우승했다. 1974년에는 세계신기록을 세웠던 그녀는 동독의 유명 체육스타이자 동독공산당국가의 상징적 선수였다.
1979년 9월 4일 레나테는 위조 서독 여권을 가지고 부다페스트에서 뮌헨으로 탈출에 성공했다. 직후 그녀는 동독의 체계적이고 광범위한 도핑행태를 폭로했다.
‘ZOV 스포츠반역자’ 전시회에서 그녀는 “약과 주사가 있었고, 우리는 실험용 돼지였다”고 말하면서 “의학적으로 우리에게 가해진 모든 일을 말할 수 없었다. 나는 라이프치히연구소의 실험그룹에 속해 있었다. 이것들은 모두 외부 세계에 말하면 안 되는 내부 문제였다”, “나와 비슷한 과거를 갖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종합비타민주스를 먹고 그렇게 빨리 달리거나 수영한 것처럼 행동하는 (동독의) 체육선수와 코치도 많다. 거울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어야 하고, 항상 자신에게 솔직해야 한다”고 증언했다.
대규모 홍수피해를 입은 김정은은 우리의 지원 제의를 ‘적은 변할 수 없는 적’이라며 비난했다. 동족·동포임을 부정하면서, 군사분계선에 담 쌓듯이 우리에게 장벽을 세우고 인민의 탈출을 눈에 쌍심지를 켜고 감시한다.
동독 스포츠반역자 사례를 반면교사 삼을 김정은이다. 동독보다 훨씬 강한 선수 선발·감시·통제 체제를 운영할 김정은이다.
대부분 어린 체육선수들이 서방 탈출을 엄두도 낼 수 없겠지만, 서방 사회를 체험한 이들의 마음과 머리는 복잡할 것이다. 체육 관계자들도 국제무대에 나와 볼수록 김정은 독재체제를 돌아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들에게 우리는 더 반갑고 따뜻하게 다가가야 한다. 우리를 외면해야 하는 그들의 처지를 이해하고, 자유 대한민국과 동포애를 보여주어야 한다. ‘적’의 핸드폰에 ‘적’과 함께 모습을 담은 북한 선수들이 험한 꼴을 당하지 않도록 기도해야 한다.
자유를 향한 발걸음이 헛되지 않도록 하고, 대한민국을 찾은 북한 동포를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단 한 분도 돌려보내지 않을 것이라는 윤석열 대통령의 육성을 떠올리며, 올림픽이라는 ‘평화의 제전’을 체육 행사 이상으로 바라보아야 하는 분단 현실이다.
<사진> 2012년 7~8월 런던 소재 ‘독일역사연구소’에서 열린 ‘ZOV 스포츠반역자’ 전시회 포스터 [사진=Zentrum deutsche Sportgeschichte Berlin-Brandenburg e.V.]
[손기웅의 통일토크] "파리 올림픽 '스포츠 반역자'는 누구?"(뉴스퀘스트, 2024.08.05)
https://www.newsquest.co.kr/news/articleView.html?idxno=228753
‘헤염 녀자 100m 자유영’은 약과다. ‘물에뛰여들기 녀자 10m 고정판 동시경기’는 좀 난해하다. 각각 ‘수영 여자 100m 자유형’과 ‘다이빙 여자 싱크로나이즈드 10m 플랫폼’의 북한식 표현이다. 음식문화에 이어 언어에도 나타나는 다름이고 특히 전문분야일수록 커진다.
취재진과 환영객을 따돌리고 파리올림픽에 입성한 북한 선수들은 훈련 외 숙소에서 두문불출이다. 간혹 외국 선수나 관중과 교류하는 모습이 포착되지만, 외부 접촉을 최소화한다. 식사도 따로 한다고 한다.
특히 우리에게 그렇다. 탁구 혼합복식 시상대에서 남북 선수들이 함께 ‘셀피’를 찍기도 했지만 예외였다. 우리 선수 인사를 피하고, 우리 언론 질문에 묵묵부답이다. 무표정 무대응을 원칙으로 삼았다.
선수들의 외부 접촉·교류에 가지는 북한의 긴장이 그대로 느껴진다. 공식대표단은 21명이다. 다이빙·탁구·레슬링·수영 등 7개 종목 선수 16명, 북한 올림픽위원장인 체육상 김일국 단장과 체육계 인사를 더하면 21명이 찬다.
보안요원은 없는 걸까? 8년 만에 참가하는 올림픽에 선수단 규모를 최소화(2016년 리우올림픽에는 선수 31명, 임원 4명)한 것은 비용 줄이기에 더해 돌발 사태 ‘탈출’을 막기 위함일 것이다. 본국에서 추가로 파견했거나, 유럽 활동 요원들이 파리로 왔을 것이다.
사회주의 형제국 동독의 멸망을 가장 열심히 연구했을 북한이다. 동독 체육인의 서방 탈출 사례도 놓치지 않고 분석하고 예방책을 강구했을 것이다.
‘스포츠반역자(Sportverräter)’, 서방 국가로 탈출한 선수에게 찍은 동독의 낙인이다. 동독법에 의하면 ‘불법적 국경통과자’인 이들의 수는 1952년부터 1989년까지 최소 615명에 달했다고 비밀경찰 슈타지(Stasi)가 보고했다.
체육을 국가 및 체제 선전의 중요 도구로 이용한 동독은 엘리트 선수들을 국가적 차원에서 육성·관리했다. 국가대표선수들은 특권적 삶을 누리고, 좋은 환경에서 훈련하고 지원 받았다.
상대적으로 풍요했던 선수들이 동독을 떠난 이유는 다양했다. 서방에 눈을 뜬 일부는 동독에 만연한 정치·경제·사회적 상황을 더 이상 받아들일 수 없었다. 체제에 부정적 언행을 보였던 선수들은 재능 계발과 발전 기회로부터 배제되었다. 승리와 성과에 대한 높은 압박감도 작용했다. 당국은 지정된 목표가 달성되지 않으면 국가 지원을 줄이거나 중단하겠다고 위협했다.
1961년 베를린장벽이 건설되기 전에는 수많은 선수와 관계자, 관련 의사들이 동독을 떠났다. 헬무트 쇤 감독이 이끄는 축구팀 ‘SG 드레스덴-프리드리히슈타트’는 1950년 선수단 거의 전체가 서베를린으로 탈출했다.
쇤은 1974년 서독월드컵에 서독 국가대표팀감독으로 참가했다. 예선전에서 동독으로부터 일격을 당한 쇤은 대회 중간에 TV에 나와 서독 국민에게 사과해야 했다. 심기일전한 쇤은 주장 프란츠 베켄바워와 울리 회네스 등의 활약에 힘입어 서독에 두 번째 우승을 안겼다.
장벽이 세워지고 동서독 국경이 완전 차단되자 탈출은 선수 개인의 단독작전이 되었다. 절호의 기회는 서방 국가에서 열리는 대회 참가 때였다. 선수들은 경기 전, 도중, 후에 비교적 방해받지 않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탈출은 서독 선수는 물론이고 제3국 체육관계자의 도움으로 일어났다. 슈타지의 추적·탄압 가능성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그런 지원은 대부분 비밀로 유지되었고, 동독 공산주의가 몰락한 후에야 알려졌다.
저명 선수의 탈출은 동독 정부에 매우 불쾌한 일이었다. 이들은 ‘운동복을 입은 외교관’으로 역할하면서 동독의 국제적 명성을 높이는 데 도움을 주어야 했기 때문이다. 체제 내적으로 주민에게 미치는 악영향도 작지 않았다.
자국민의 해외 출입을 엄격히 통제한 동독은 슈타지에게 사업 및 목적에 따라 ‘비사회주의적 경제권(Nichtsozialistische Wirtschaftsgebiet)’으로 여행을 허용하는 대상자, ‘특별여행단(Reisekader)’을 선별·관리하도록 했다. 정부 또는 정당 관계자, 공적 활동가, 경제 관련자 등이 대상에 포함되었다. 슈타지 제19부가 관리한 Reisekader 규모는 약 4만 명에 달했다.
체육선수는 예술가, 학자, 시장과 함께 공적 활동가에 해당되었다. 슈타지는 선수의 발굴 초기부터 조사·감시·통제하면서 Reisekader 선정 여부를 결정했다.
‘스포츠반역’을 막기 위해 동독은 Reisekader에 속하는, 충분히 신뢰할 수 있다고 판단되는 선수들만 서방 국가, 특히 서독 개최 대회에 데려갔다. 그럼에도 선수들은 대회 기간 여권 등 개인 서류를 압수당했다.
1950년에 신설된 슈타지는 또한 바람직하지 않거나 의심스러운 개인·단체를 비밀조사·감시하는 ‘공작작전(Operativer Vorgang: OV)’을 진행했다. 대상자를 종합적으로 관찰하는 것뿐만 아니라 전화 도청, 서신 개봉, 자택 비밀 수색 등이 실행되었다. 가족, 친구, 직장 동료에 대한 감시도 당연했다. 조치가 필요한 경우에는 직업적 실패, 가정 파괴, 중상모략 등도 자행했다. 대상자를 아예 슈타지 요원으로 채용하려는 시도도 이뤄졌다.
시간이 갈수록 OV는 체계화되고 광범위해졌다. 체육선수, 민권운동가, 작가, 예술가 등 활동을 통해 주목 받은 수많은 사람들이 대상이었다. 1985년부터 1988년까지 슈타지는 매년 4,500~5,000건의 OV를 추진했다.
1970년대 초부터 슈타지는 포괄적인 감시체제 운영과 개별적 통제를 통해 동독 선수의 ‘공화국탈출’ 가능성에 예방적으로 대응하려 노력했다. 집중적으로 감시하는 이른바 ‘스포츠보안부(Sicherungsbereich Sport)’의 대상은 최고 기량의 선수 및 친구, 가족을 포함해 최소 10만명이었다. 이들을 감시하기 위해 약 3천명의 슈타지 비밀요원이 투입되었다.
슈타지는 또한 주요 스포츠반역자를 선정해 이들의 탈출 경위를 상세히 조사하고, 탈출 후 근황을 감시할 뿐만 아니라, 이들의 삶을 방해하고 다시 잡아오려는 ‘중앙공작작전(Zentraler Operativer Vorgang: ZOV)’을 시행했다. 통일 후 63건의 ZOV사례가 확인되었다.
탈출에 성공한 선수들은 정신적 고통을 겪어야 했다. 슈타지는 동독에 남은 가족과 친지들을 압박해 탈출선수들이 돌아오도록 설득하게 했다. 성공하지 못할 경우 보복했다.
친·인척들에게는 사회 체계로부터 소외시키려는 의도적인 감시·조작·명예 훼손 등 소위 ‘분해조치(Zersetzungsmaßnahmen)’가 행해졌다. 탈출선수도 예외가 아니어서 선수로서의 생명을 끊게 하려거나 생명 자체를 위협했다.
동독 언론들은 탈출선수를 ‘사회주의 이상에 대한 반역자(Verräter an den Idealen des Sozialismus)’로 낙인찍거나, ‘부도덕한 인신매매범의 피해자’로 묘사해 서독·서방의 책임으로 몰고자 했다.
당국은 이들이 대중의 뇌리에서 사라지게 노력했다. 참가했던 경기대회 목록·통계에서 이름이 삭제되고 사진들이 수정되었다. 탈출에 관해 당국이 함구하게 했던 상황에서 이 명령을 실행해야 했던 언론의 스포츠 편집부 직원들이 탈출을 가장 먼저 알아차린 경우가 많았다.
1989년 12월 ‘ZOV 스포츠반역자’ 최종보고서에 따르면 최소 615명의 선수, 감독·코치, 의사들이 서방으로 탈출했다. 분야도 축구, 사이클, 육상, 수영, 농구, 레슬링, 역도, 경보, 조정, 카누, 피겨 스케이팅, 아이스하키, 스키, 노르딕 복합, 루지(경주썰매) 등 다양했다.
경기력이나 체제 충성심 부족으로 해외 원정에 포함되지 않은 선수들은 고전적인 탈출 방법을 택해야 했다. 400m 이상 자유형 수영 부문 동독 챔피언 악셀 미트바우어는 1968년 부다페스트에서 열린 경기에 참가 중 서독 선수와 코치에게 어떻게 서독으로 탈출할 수 있는지를 물었다.
얼마 후 그는 슈타지에 체포되어 동베를린으로 압송되었다. 7주 동안 독방에 감금되어 심문 받은 그는 경기 참가와 체육시설 이용이 평생 금지되고, 슈타지의 특별감시대상이 되었다.
1969년 8월 17~18일 밤 악셀은 멋진 탈출에 성공했다. 그는 동해(Ostsee)에 몸을 던져 서독의 뤼벡까지 22㎞를 헤엄쳐 갔다.
2011년 7월 베를린 빌리 브란트 하우스에서는 ‘ZOV 스포츠반역자’를 주제로 15명의 주요 탈출선수에게 헌정된, 그들의 인생을 소개하는 전시회가 열렸다. 여기서 악셀은 그 밤은 ‘내 인생과의 경기’였다고 웃으며 술회했다. 전시회는 해외에서도 개최되었다.
스포츠 강국 동독은 건국부터 1989년 몰락 때까지 국제대회에서 4,000회 이상의 승리를 거두었고, 동독은 항상 메달 순위 상위 3분의 1에 들었다. 물론 여기에는 국가중요기밀산업으로 육성된 동독의 스포츠과학연구를 활용한 체계적인 도핑이 한몫했다.
레나테 포겔은 1955년 칼-마르크스 시에서 태어난 수영선수였다. 동독 챔피언은 물론이고 1972년 뮌헨올림픽에서 은메달을 획득하고, 1973년 베오그라드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우승했다. 1974년에는 세계신기록을 세웠던 그녀는 동독의 유명 체육스타이자 동독공산당국가의 상징적 선수였다.
1979년 9월 4일 레나테는 위조 서독 여권을 가지고 부다페스트에서 뮌헨으로 탈출에 성공했다. 직후 그녀는 동독의 체계적이고 광범위한 도핑행태를 폭로했다.
‘ZOV 스포츠반역자’ 전시회에서 그녀는 “약과 주사가 있었고, 우리는 실험용 돼지였다”고 말하면서 “의학적으로 우리에게 가해진 모든 일을 말할 수 없었다. 나는 라이프치히연구소의 실험그룹에 속해 있었다. 이것들은 모두 외부 세계에 말하면 안 되는 내부 문제였다”, “나와 비슷한 과거를 갖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종합비타민주스를 먹고 그렇게 빨리 달리거나 수영한 것처럼 행동하는 (동독의) 체육선수와 코치도 많다. 거울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어야 하고, 항상 자신에게 솔직해야 한다”고 증언했다.
대규모 홍수피해를 입은 김정은은 우리의 지원 제의를 ‘적은 변할 수 없는 적’이라며 비난했다. 동족·동포임을 부정하면서, 군사분계선에 담 쌓듯이 우리에게 장벽을 세우고 인민의 탈출을 눈에 쌍심지를 켜고 감시한다.
동독 스포츠반역자 사례를 반면교사 삼을 김정은이다. 동독보다 훨씬 강한 선수 선발·감시·통제 체제를 운영할 김정은이다.
대부분 어린 체육선수들이 서방 탈출을 엄두도 낼 수 없겠지만, 서방 사회를 체험한 이들의 마음과 머리는 복잡할 것이다. 체육 관계자들도 국제무대에 나와 볼수록 김정은 독재체제를 돌아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들에게 우리는 더 반갑고 따뜻하게 다가가야 한다. 우리를 외면해야 하는 그들의 처지를 이해하고, 자유 대한민국과 동포애를 보여주어야 한다. ‘적’의 핸드폰에 ‘적’과 함께 모습을 담은 북한 선수들이 험한 꼴을 당하지 않도록 기도해야 한다.
자유를 향한 발걸음이 헛되지 않도록 하고, 대한민국을 찾은 북한 동포를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단 한 분도 돌려보내지 않을 것이라는 윤석열 대통령의 육성을 떠올리며, 올림픽이라는 ‘평화의 제전’을 체육 행사 이상으로 바라보아야 하는 분단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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