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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기웅의 통일토크] "세계사를 바꾼 ‘범유럽 소풍’"(뉴스퀘스트, 2024.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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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322회 작성일 24-08-29 0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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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범유럽 소풍’ 포스터

<사진> ‘범유럽 소풍’ 행사지 헝가리 쇼프론 위치. 동독 주민은 폴란드나 체코슬로바키아를 돌아 이곳까지 와야 했다. [사진=구글지도]

<사진> ‘범유럽 소풍’ 기념비 [사진=Fekist CC BY-SA 3.0]

<사진> ‘범유럽 소풍’ 기념비 [사진=fotopocza]

<사진> 독일 연방의회에 부착된 헝가리의 1989년 9월 10일 국경 개방 기념판 [사진=Ungarnreal]


[손기웅의 통일토크] "세계사를 바꾼 ‘범유럽 소풍’"(뉴스퀘스트, 2024.08.26)

https://www.newsquest.co.kr/news/articleView.html?idxno=230001

35년 전 8월 19일은 세계사적 변곡점이었다.

자유, 민주화, 인권에의 의지가 대담한 ‘거사’를 일으켰고, 유럽의 지도를 바꾸고 새로운 세상을 도래케 했다.

포성이 도처에서 울리는 지구, 다시 꿈과 영감(靈感)이 필요한 시기다.

1989년 5월 2일 새벽, 헝가리가 오스트리아 국경에 세운 철조망울타리를 잘랐다. 냉전과 동유럽국들의 서방 단절을 상징한 ‘철의 장막(Iron Curtain)’에 구멍이 뚫렸다.

이 역사적 사건이 아무런 팡파르 없이 진행돼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헝가리의 제안으로 헝가리 외무장관 호른과 오스트리아 외무장관 모스크가 6월 27일 장막 해체 장면을 재현해 세상에 알렸다.

헝가리 쇼프론(Sopron)과 오스트리아 클링겐바흐(Klingenbach)를 연결하는 국경지점이었다.

서방 언론, 특히 서독 TV·라디오로 이를 접했던 동독 주민들의 판단과 결단에는 긴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탈출구 헝가리로 휴가계획을 세웠다. 5월 7일자 칼럼 “헝가리와 중국의 다른 선택”에 소개된 내용이다.

정치·경제적 개혁, 서방과의 관계 개선으로 확고하게 방향을 잡은 헝가리는 더 극적인 ‘의거’를 계획했다. 이번에도 오스트리아와 함께였다. 구멍을 넘어 아예 철의 장막을 열어 제치고자 한 것이다.

소련공산당 서기장 고르바초프가 내세운 ‘페레스트로이카(개혁)’과 ‘글라스노스트(개방)’을 두 기둥으로 하는 ‘새로운 정치적 사고(New Political Thinking)’의 상징인 ‘시나트라 독트린(Sinatra Doctrine: 소련이 맹주로 군림했던 동유럽 국가들에게 각자의 내정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도록 허용한다는 원칙)’을 본격 시험하고자 했다. 국가 진로 향방을 건 모험이었다.

일시는 1989년 8월 19일, 행사명은 ‘범유럽 소풍(Pan-European Picnic)’. 고르바초프는 물론이고 전 세계가 공감하도록 평화 행사로 포장했다.

공식 상징도 철조망을 뚫고 나오는 비둘기였다. 장소는 이번에도 오스트리아에 맞닿은 헝가리 국경지 쇼프론이었다.

주최는 ‘범유럽연합(Paneuropean Union)’. 오스트리아 태생의 정치인이자 철학자인 리하르트 니콜라우스 에이지로 폰 코우덴호페칼레르기 백작(父 오스트리아, 母 일본)이 1923년 저서 ‘범유럽(Paneuropa)’에서 제시한 ‘통일된 유럽’ 개념을 실천하기 위해 설립한,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통합운동 단체다.

1989년 당시 범유럽연합 회장이었던 오스트리아인 오토 폰 합스부르크는 ‘범유럽 소풍’으로 몇 시간만이라도 오스트리아-헝가리 국경을 개방해 고르바초프의 반응을 보고자 했다.

폰 합스부르크는 헝가리 총리 미클로스 네메스에 이를 제안했고, 네메스는 수락을 넘어 아예 함께 추진하자고 화답했다.

적대적 군사동맹체인 NATO 회원국 어느 나라와도 국경을 접하지 않는 헝가리가 중립국 오스트리아와의 국경을 개방해도 ‘시나트라 독트린’을 선언한 고르바초프가 적극 개입하지는 않으리라는 계산도 했다.

그럼에도 자극하지 않기 위해 폰 합스부르크와 네메스는 소풍 중간에 철의 장막, 실제 나무철조망 장벽을 3시간 동안 상징적으로 열기로 했다.

헝가리는 이 대규모 소풍 행사를 동유럽국가 시민들이 모여 자유와 민주화를 염원하는 자리로 만들어, 동유럽 민주화 운동을 지지하고 국제사회에 헝가리의 개혁 의지를 알리고자 했다.

헝가리 정부가 적극 나서 다양한 시민 단체와 협력해 행사를 준비했다. 홍보는 주로 서방 언론을 통했고, 국제적 관심을 끌었다.

소풍에 누구보다 숨죽이며 기다린 이들은 동독 주민들이었다. 사회주의 형제국 헝가리에 여름휴가를 핑계로 동독 당국의 허가를 받고 왔다.

문이 열리자마자 600~700명의 동독 주민이 달려들어 철의 장막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자유를 찾아 즉시 부다페스트 주재 서독대사관으로 달려갔다. 1961년 8월 13일 베를린장벽이 구축된 이래 최대 규모의 대량 탈출이었다.

고르바초프는 ‘시나트라 독트린’을 지켜 개입하지 않았다. 소식이 알려지자 동독 주민의 헝가리행 ‘엑소더스(Exodus)’가 시작되었다.

성공에 자신을 얻은 헝가리는 마침내 9월 10일 국경을 완전 개방했다. 동독 주민들이 파도와 같이 밀어닥쳤다. 체코슬로바키아도 새로운 탈출 통로가 되었다. 한 달 안에 십만 명 이상의 동독 주민이 서독, 자유의 땅을 밟을 수 있었다.

11월 9일 마침내 통한의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었다. 철의 장막이 무너졌고, 이듬해 독일이 통일되었다.

동구 공산권이 분해되면서 군사동맹체 ‘바르샤바조약기구(WTO)’가 해체되고 냉전이 종식되었다.

소련 붕괴가 이어졌다.

‘범유럽 소풍’은 첫째, 민주화의 이정표였다.

동유럽 시민들에게 희망을 주어 자유와 인권과 민주화를 위한 투쟁에 나서도록 자극했다. 동유럽 전역에 민주화 운동이 확산되는 계기였다.

둘째, 베를린 장벽 붕괴의 서막이었다. 대규모 주민 탈출은 동독의 정통성과 통제력 약화를 의미했고, 주민들의 대규모 시위와 저항으로 이어졌다.

장벽이 무너지고 결국 동독이 역사 속으로 소멸했다.

셋째, 유럽 통합의 발판이었다.

동유럽 국가들의 대서방 관계 개선, 민주화 및 평화공존 의지의 상징이 되어 이후 유럽연합(EU)의 동유럽 확장에 기여했다.

‘범유럽 소풍’은 오늘날에도 그 의미가 여전히 유효하다. 자유, 민주화, 인권을 위한 노력에 창조적이고 기발한 착상을 자극하여 지속적인 투쟁으로 향하게 하는 상징이다.

북·중 국경 통제가 강화되고 북한이 DMZ에 벽을 쌓고 있다.

한반도 모든 주민의 자유·민주·인권·복지를 위해 ‘한반도 소풍’(가칭)을 기획하는 영감과 용기가 요청되는 현실이다.

통일된 독일의 베를린 연방의회 건물에는 “1989년 9월 10일은 독일 통일, 독립국가 헝가리 그리고 민주적 유럽을 위한 독일과 헝가리 민족 간 우호의 상징”이라 새겨진 ‘헝가리 국경 개방 기념판’이 부착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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