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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기웅의 통일토크] "고르바초프, 위대한 정치가·사상가·행동가"(뉴스퀘스트, 2024.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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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246회 작성일 24-09-03 2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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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1989년 6월 13일 독·소 공동성명 발표 당시 고르바초프와 콜 [사진=Bundesregierung/Jüttner]

<사진> 1989년 10월 동독 40주년 기념식에 참석한 고르바초프와 호네커 간 마지막 형제의 키스 [사진=Keystone | EPA Wolfgang Kumm]

[손기웅의 통일토크] "고르바초프, 위대한 정치가·사상가·행동가"(뉴스퀘스트, 2024.09.02)

https://www.newsquest.co.kr/news/articleView.html?idxno=230487

인생을 통해 가장 위대한 정치인을 꼽으라면 주저 없이 미하일 고르바초프를 떠올린다. 그로 인해 냉전이 종식되었고, 세계사가 바뀌었다. ‘범유럽 소풍’도, 독일 통일도 그가 없었다면 상상하기 어렵다.

존 F. 케네디를 포함해 많은 정치인들이 새로운 사고와 세계를 꿈꾸고 행동했지만, 고르바초프는 실제적 결과를 창출했다.

1989년 독일, 특히 동독은 어수선했다. 35년이 지난 지금은 동유럽과 동독의 정국이 어떻게 전개되었고, ‘key players’ 서독과 전승4국 미·영·프·소가 어떤 입장에서 어떻게 대응해 독일이 통일되고 냉전이 해체되었는지 상세히 일목요연하게 정리할 수 있다.

하지만 당시 서베를린에서 동독 내 소요, 폴란드 자유노조, 헝가리 개혁 정책 등 동유럽 변화를 주시했던 필자에게 독일 상황과 유럽 정세는 안개 속이었다.

특히 1985년 3월 11일 54세의 젊은 나이로 소련공산당 총서기로 선출된 고르바초프가 ‘페레스트로이카’(개혁)과 ‘글라스노스트’(개방)이라는 역사적인 변혁 정책을 시작했다는 정도만 듣고 있었지, 그가 무슨 생각을 어떻게 구체적으로 가졌는지 알 수 없었다. 1989년 6월 12일 서독을 방문한 고르바초프가 다음날 헬무트 콜 총리와 함께 발표한 ‘독·소 공동성명(Gemeinsame deutsch-sowjetische Erklärung)’을 접하기 전까지.

공동성명을 읽는 순간 전율 같은 감동이 온 몸에 번졌다. 아니 어떻게 이런 생각을... 이 사람이 과연 공산주의 수괴란 말인가...

동서로 나뉜 유럽의 분단 극복과 평화 회복, 새로운 유럽의 평화질서로 ‘유럽 공통의 집’ 구상, 모든 국가의 주권과 안보 존중, 군비 경쟁과 전쟁 배제, 군비 감축 등 유럽은 물론 세계 질서를 다시 짜려는 근본적 변혁 의지가 담겼다.

더구나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전범국이자 가장 막대한 피해를 주었던, 동유럽 군사동맹체 바르샤바조약기구(WTO)와 대립하는 적대적 동맹체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핵심국인 서독과.

조문을 떼어내 분석·제시하기보다 주요 원문(Bulletin des Presse- und Informationsamtes der Bundesregierung, 1989.06.15, p. 543)을 그대로 실어 1989년 6월의 감동을 공유하고자 한다.

“평화로운 미래를 형성하는데 탁월한 역할이 유럽에 부여되고 있다. 대륙이 수십 년 동안 분리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유럽의 정체성과 공통성에 대한 인식은 여전히 ​​살아 있으며 점점 더 강해지고 있다. 이러한 발전이 촉진되어야 한다. 서독과 소련은 역사적으로 성장한 유럽의 전통을 토대로, 유럽의 분단 극복에 기여하는 것을 자국 정책의 최우선 과제로 삼는다. 양국은 평화와 협력의 유럽, 유럽 평화 질서 혹은 미국과 캐나다도 참여하는 유럽 공통의 집을 건설함으로써 이 목표를 어떻게 달성할 수 있는지에 대한 구상을 함께 논의하기로 결의한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으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유럽은 사회제도의 차이에 관계없이 공동선을 위해, 모든 국가의 역량을 하나로 모으는 안정된 평화와 선린 우호, 건설적 협력의 모범을 세계에 보여야 한다. 유럽 ​​국가들은 서로에 대한 두려움 없이, 그리고 서로 평화롭게 경쟁하며 살아갈 수 있고 또 그렇게 해야 한다. 평화와 협력의 유럽을 구성하는 요소는 다음과 같아야 한다: 모든 국가의 완전성과 안보에 대한 전적인 존중. 모든 국가는 자신의 정치적, 사회적 체제를 자유롭게 선택할 권리가 있다.”

“서독과 소련은 타국의 안보를 희생하면서 자국의 안보를 보장해서는 안 된다고 선언한다. 따라서 양국은 건설적이고 미래지향적인 정책을 통해 긴장과 불신의 원인을 제거함으로써, 오늘날에도 여전히 존재하는 위협의 감정이 점차 상호 신뢰의 상태로 대체될 수 있도록 하는 목표를 추구한다. 양측은 모든 국가에게 그 크기와 세계관적 지향에 관계없이 정당한 안보 이익이 있음을 인정한다. 양국은 군사적 우월성 추구를 비난한다. 전쟁은 더 이상 정치의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 안보 정책과 전력 계획은 전쟁의 위협을 줄이거나 제거하는데 그리고 더 적은 수의 무기로 평화를 확보하는 데에만 기여해야 한다.

이는 군비 경쟁을 배제한다. 양측은 효과적인 국제적 통제 하에 구속력 있는 협정을 통해 기존의 비대칭성을 제거하고, 군사적 잠재력을 방어에는 충분하지만 공격에는 충분하지 않은, 안정적이고 낮은 수준의 균형으로 줄이려는데 진력한다. 양측은 기습공격과 대규모 공세를 수행할 수 있는 군의 능력을 배제하는 것이 특히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범유럽 소풍’을 빙자한 헝가리의 국경 개방을 용인한 고르바초프는 1989년 10월 7일 동독 40주년 행사에 초청 받아 동독공산당 서기장 에리히 호네커에게 “너무 늦게 오는 자를 삶은 벌한다(Wer zu spät kommt, den bestraft das Leben.)”면서 개혁·개방을 강력히 주문했다.

고르바초프는 체제 개혁을 요구하는 동독 주민 시위가 전국으로 확산되는 상황에서 무력 진압의 허용과 지원을 요청하는 동독 수뇌부를 거부해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도록 했고, 1990년 7월 16일 코카서스에서 콜과 회동해 독일 통일에 동의했다. 냉전 종식의 길을 열었다.

고르바초프는 아프가니스탄의 소련군 철수, 동구권 개혁, 독일 통일, 냉전 체제 종식, 동서방 진영 화해 등 엄청난 변화와 평화운동에 선도적으로 역할한 공로를 인정받아 1990년 10월 15일 공산권 정치지도자 중 최초로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12월 10일 오슬로에서 열린 시상식에 불안했던 국내 정국으로 인해 참여치 못한 고르바초프는 다음과 같은 수상 연설을 전달했다.

“저는 낙관주의자입니다. 그리고 저는 우리가 함께 지금 올바른 역사적 선택을 하여, 세기와 천년의 전환기에 있는 위대한 기회를 놓치지 않고 현재의 극도로 어려운 전환기를 평화로운 세계 질서로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권력의 균형보다는 이해관계의 균형, 다른 사람을 희생하여 이익을 추구하는 것보다는 타협과 화합의 추구, 리더십 주장보다는 평등의 존중 - 이러한 요소들은 세계 진보의 토대를 제공할 수 있으며, 또한 20세기의 경험에 입각한 합리적인 사람들에 의해 쉽게 받아들여질 것입니다. 진정으로 평화로운 세계 정치의 미래 전망은 국가가 자국 시민의 인권과 복지를 우선시하고, 다른 곳에서도 동일한 권리와 유사한 복지를 증진하는 단일 국제 민주주의 공간을 공동의 노력을 통해 창조하는 데 있습니다. 이는 현대 세계의 통합성과 그 구성 요소의 상호 의존성이 커지는 데 필수적입니다.”

“저는 노벨상 수상을 저의 의도, 열망, 우리나라에서 시작한 심오한 변화의 목표, 새로운 사고의 아이디어에 대한 이해의 표현으로 봅니다. 저는 그것을 페레스트로이카의 목표를 이행하는 평화적 수단에 대한 저의 헌신을 인정한 것으로 봅니다.”

“평화는 분할될 수 없다는 생각이 지금처럼 진실이었던 적이 없었습니다. 평화는 유사성 속의 통일이 아니라 다양성 속의, 차이점들의 비교와 화해를 통한 통일입니다.”

“오늘날 평화는 단순한 공존에서 국가와 민족 간의 협력과 공동 창의성에로의 상승을 의미합니다.”

“세계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은 냉전에 의해 형성된 오래된 고정관념과 동기를 단호히 버리고, 서로의 약점을 찾아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이용하는 습관을 포기해야 합니다.”

작금의 우리에게 세계에 울리는 힘이다. 그 외 필자의 가슴에 닿은 그의 주요 어록을 소개한다.

“우리는 오랜 가치들로부터 후퇴했습니다. 저는 새로운 가치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후퇴한, 보편적으로 알려진 가치를 되살리려는 것입니다. 저는 젊은 시절에 공산주의 이상을 진심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젊은 영혼은 정의, 평등과 같은 것을 분명히 거부할 수 없습니다. 이것들은 공산주의자들이 선포한 목표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그 끔찍한 공산주의 실험은 인간존엄성의 억압을 가져왔습니다. 폭력은 사회에 그 모델을 강요하기 위해 사용되었습니다. 공산주의의 이름으로 우리는 기본적인 인간 가치를 버렸습니다. 그래서 제가 러시아에서 집권했을 때 저는 그러한 가치들, 즉 ‘개방성’과 자유의 가치를 회복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인류에게 사형을 선고할 수 있는 국가 지도자들의 권리를 거부합니다. 우리는 판사가 아니며, 수십억의 사람들이 처벌받아야 할 범죄자도 아닙니다. 핵단두대를 허물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핵보유 강대국들은 핵의 그림자를 뛰어넘어 핵 없는 세상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시장은 자본주의의 발명품이 아닙니다. 시장은 수세기 동안 존재해 왔습니다. 시장은 문명의 발명품입니다.”

앞서 언급한 “너무 늦게 오는 자를 삶은 벌한다”를 고르바초프가 실제 호네커에게 말했는가에 관해 논란이 있다. 확인된 그의 육성 발언은 동독 40주년 하루 전인 1989년 10월 6일 동베를린 시가지에서 그를 둘러싼 기자들 가운데 서독 ARD(우리의 KBS1) TV를 향해 “나는 삶에 반응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만 위험이 기다리고 있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삶에서 나오는 충격, 즉 사회에서 나오는 충격을 받아들이고 그에 따라 정책을 수립하는 사람은 어떠한 어려움도 가지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정상적인 현상입니다.”였다.

호네커와 대화에서도 이와 비슷한 대화가 오갔고, 기자가 이를 매력적인 표현, “너무 늦게 오는 자를 삶은 벌한다”로 정리했다. 나중에 이를 알게 된 고르바초프는 좋아했고, 자서전에서 이 문장을 사용했다는 것이다.

미하일 고르바초프, 자신의 노선을 반대한 마르크스-레닌주의 강경파가 1991년 8월 18일 일으킨 쿠데타로부터 살아남았지만, 12월 25일 권좌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1992년 1월 소련은 ‘독립국가연합(CIS)’의 출범과 함께 해체되었다.

2009년 5월 26일 강원도 화천군 평화의 댐에서 열린 ‘세계 평화의종 공원’ 준공식에 고르바초프는 노벨평화상 수상자 자격으로 찾았다. 세계 평화에 대한 그의 기여에 감사의 마음을 전할 수 있었고, 얼마 후 그가 머물렀던 화천군 통나무집도 찾아 파란만장했던 그를 추억했다.

며칠 전 8월 30일은 그의 서거 2주기였다.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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