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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기웅의 통일토크] "동독 간첩 '귀욤'의 환영, 22대 대한민국 국회에 어른거린다" (뉴스퀘스트, 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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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97회 작성일 24-04-24 1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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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브란트와 귀욤(검은 안경) [사진=Picture Alliance]

<사진> 1960년대 초 귀욤 가족 [사진=NDR]

[손기웅의 통일토크] "동독 간첩 '귀욤'의 환영, 22대 대한민국 국회에 어른거린다" (뉴스퀘스트, 2024.04.22)

https://www.newsquest.co.kr/news/articleView.html?idxno=222143

▲ 체포

50년 전 4월 24일, “나는 동독 국민이자 인민군 장교(대위)입니다, 그것을 존중해주십시오”라 뱉으며 서독 수상 빌리 브란트(Willy Brandt)의 보좌관 귄터 귀욤(Günter Guillaume)이 체포되었다. 죄명은 동독의 비밀경찰인 국가안보성 ‘슈타지(Stasi)’ 산하 ‘첩보부(Hauptverwaltung Aufklärung: HVA)’ 소속 간첩.

‘신동방정책(Neue Ostpolitik)’으로 동독 및 동구권과 관계를 개선한, 독일 통일의 초석을 놓은 위대한 정치인, 브란트의 공직이 끝나는 순간이었다.

귀욤 사건은 1949년 서독 건국 이후 가장 충격적이고 폭발적인 최대의 간첩 사건이었다. 1954년 우리의 헌법재판소 격인 서독 연방헌법수호청(Bundesamt für Verfassungsschutz: BfV) 오토 존(Otto John) 청장이 동독으로 넘어가고, 1960년 사민당(SPD) 소속 연방의원 알프레드 프렌쩰(Alfred Frenzel)이 체코슬로바키아 간첩으로 체포되고, 1961년 우리의 국가정보원 격인 서독 연방정보원(Bundesnachrichtendienst: BND) 하인쯔 펠페(Heinz Felfe) 실장이 소련 간첩으로 밝혀진 것보다 훨씬 더 큰 타격을 서독 정부에 안겼다.

▲서독 잠입

히틀러의 제3제국 시기에 나치당원으로 활동하다 영국군 포로가 되고 탈출한 귀욤은 모험심에 정치적 신념을 더해 슈타지의 일원이 되기로 결심했다. 당시 나치 전력(前歷)의 다수가 선택했던 길이기도 했다.

1952년 동독공산당(SED)에 입당한 귀욤에게 슈타지의 마르쿠스 볼프(Markus Wolf) HVA 수장(1952-1986)은 1954년 암호명 ‘한센(Hansen)’을 부여해 ‘위장요원(Inoffizieller Mitarbeiter: IM)’으로 활동하게 하고, 1955년 10월부터 서독 업무를 전담하게 했다. 1951년 결혼한 아내 크리스텔 보옴(Christel Boom) 역시 1958년 IM이 되어 ‘하인쩨(Heinze)’란 암호명을 받았다.

슈타지는 귀욤 부부를 1956년 서독으로 잠입시켰다. 이들의 서독 정착은 네덜란드 국적인 귀욤의 장모를 이용했다. 먼저 장모가 서독의 프랑크푸르트로 거주지를 옮기도록 한 후, 귀욤 부부는 자유를 찾아 서독 장모에게 가는 형식으로 동독을 위장 탈출했다. 일반적으로 동독탈출자가 거쳐야 하는 서독 임시수용소에서의 강도 높은 심문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HVA로부터 받은 활동자금 1만DM(서독마르크)로 귀욤은 일단 커피·담배 가게를 운영했고, 크리스텔은 비서직을 얻었다. 곧 단파방송을 통한 슈타지의 지령으로 당시 서독 야당이던 진보정당 SPD 침투를 명령받았다.

이때 이미 서독 BND는 다수의 동독 정보통으로부터 귀욤이 동독 체제를 위해 적극 활동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 BfV도 그에 대한 간첩 혐의를 제기했으나, 명확한 증거가 없어 그를 체포할 수 없었다.

BfV는 1956년 6월부터 1959년 1월까지 동독 단파방송을 통한 약 100건의 슈타지 지령을 탐지했다. 이것들이 서독에서 암약하는 어느 동독 부부 요원에게 SPD 관련 정보 획득 임무를 지시하는 것으로 파악은 했으나, 구체적으로 그 부부를 특정할 수는 없었다. 십수 년 후에야 BfV은 귀욤 부부로 확정해 체포할 수 있었다.

▲프랑크푸르트 암약

귀욤은 1962년 SPD 남헤센 지역기관지 ‘사회민주주의자(Der Sozialdemokrat)’의 사진기자로 활동하면서 인정받기 시작했다. 1964년에는 SPD 프랑크푸르트 구역사무총장, 1968년에는 SPD 프랑크푸르트시 사무총장과 인연을 맺었고, 서독 연방의원으로 훗날 연방교통부장관(1966–1969), 연방체신부장관(1969–1972), 연방국방부장관(1972–1978) 및 연방의회부의장(1979–1983)이 된 게오르그 레버(Georg Leber)의 선거책임자로 활동할 수 있었다.

슈타지는 이 시기에 그의 부인 크리스텔에 더욱 관심을 가졌다. 크리스텔은 1959년부터 SPD 남헤센 지역사무소에서 비서로 일하면서 연방의원 빌리 비르켈바흐(Willi Birkelbach)를 도울 기회를 가졌다. 1964년 비르켈바흐가 헤센 주정부 총리실장(1964-1969)이 되었을 때, 크리스텔은 그의 두 번째 문고리 비서역을 맡아 주요 기밀문서에 접근할 수 있었다. 크리스텔이 중요 문서를 집에 가져오면 귀욤이 사진을 찍어 슈타지에 전달했다.

체포 후 귀욤의 재판과정에서 크리스텔이 비르켈바흐 책상 위에 놓였던 NATO의 주요 기밀도 획득해 누설했느냐가 쟁점이 되었다. 구체적으로 NATO의 군사훈련 ‘Fallex 64’와 ‘Fallex 66’이었는데, 통일 이후 확보된 HVA의 DB에 의하면 1965년 슈타지에 ‘Fellex 64’ 훈련을 평가한 7페이지 분량의 문서가 전달되었다는 기록이 발견되어 크리스텔의 간첩혐의가 명확해졌다. 1967년에는 ‘Fellex 66’ 훈련 결과에 관한 41페이지 분량의 문서가, 1970년에는 82페이지 분량의 비르켈바흐 개인 신상기록이 크리스텔에 의해 HVA에 전달된 것으로 판명되었다.

이 기간 동안 귀욤은 볼프를 최소한 두 번 만났으며, 1964년 말 볼프는 귀욤에게 장래가 촉망되는 SPD 정치인을 도와주며 접근할 것을 지시했다. 향후 서독 정권이 보수당인 기민당(CDU)에서 SPD로 바뀔 것을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귀욤은 아내를 관리하는 한편, ‘프리츠(Fritz)’와 ‘막스(Max)’로 명명한 두 명의 서독 SPD 거물 정치인과 접촉해 슈타지가 흥분할 만한 정보를 제공했다. 귀욤은 마이크로필름화된 정보를 시가통에 담아 암호명 ‘하인쯔(Heinz)’라는 접촉요원을 통해 동베를린으로 전달했다.

귀욤에게 이러한 임무를 부여한 동독의 의도는 볼프의 지시로 슈타지가 작성한 연구보고서에서 파악될 수 있다. 1974년에 작성된 논문에는 예를 들어 서독 연방수상청이 어떻게 운영되는지, 서독 정당정치에 있어서 정권 교체 시 수상청의 지도부와 그 지원인력(비서, 문서작성자, 자문인력, 운전기사 등)이 어떻게 구성되는가가 분석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동독 HVA가 어떻게 수상청에 접근해 활동해야 하는가가 제시되었다. 1969년 귀욤의 연방수상청 진입이 이러한 지침 작성의 토대가 되었음은 자명하다.

▲연방수상청 입성

1966년 연방교통부장관이 된 레버의 선거를 도왔던 귀욤은 1969년 7월 레버에 관한 9페이지 분량의 보고서를 HVA에 보냈다. 1969년 10월 총선에서 SPD가 승리하자 레버를 통해 수도 본으로 진출할 수 있었다.

그리고 브란트가 연방수상으로 선출되자 연방체신부장관으로 옮긴 레버가 귀욤을 수상청의 새 경제담당 헤르베르트 에렌베르크(Herbert Ehrenberg)에게 능력 있는 당원이라며 추천해 귀욤은 마침내 연방수상청에 입성할 수 있었다. 곧 아내도 본 주재 헤센주 대표부로 옮겨왔다. 암약 15년만의 쾌거였다.

귀욤의 수상청 진입에 반대도 있었다. 그의 능력이 제대로 검증되지 않았고, 특히 보안상의 우려도 있다고 논의되었다. 귀욤에 관한 의무적 인사검증과정에서는 앞서의 1950년대에 BfV가 작성한 간첩 혐의도 제기되었다.

그러나 수상청의 새로운 주인들은 그것이 “냉전 시기에 만들어진 근거 없는 혐의”에 불과하다고 간주하고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결국 동독 간첩 귀욤은 1970년 1월 1일부로 수상청에 정식 배치되었다.

귀욤은 밤낮을 가리지 않는 열성과 헌신으로 빠르게 수상청에 자리를 잡아 노조담당 책임자로 승진했고, 여직원들에게 접근해 호감을 얻었다. 그중 하나가 브란트의 고문이면서 ‘신동방정책’과 ‘독일정책(Deutschlandspolitik)’을 설계하고 자문했던 에곤 바(Egon Bahr)의 여비서였다. 당시 서독이 ‘기본조약(Grundlagenvertrag)’ 체결을 두고 동독과 협상하던 시기에 귀욤은 여비서와 육체적 관계를 가지면서 기밀에 접근했다.

귀욤은 서독 정부 내 최고급 정보에 접근할 수 있었다. 통일 이후 HVA 총책 볼프의 증언에 의하면, 1970년 브란트와 동독 총리 빌리 슈토프(Willi Stoph) 간 사상 최초의 독-독 정상회담을 앞두고 서독 정부가 어떤 그림을 그리고 있는지 동독이 거의 완벽하게 파악하는데 귀욤이 기여했다고 한다.

1970년 브란트가 1차 동서독 정상회담을 위해 동독의 에어푸르트(Erfurt)를 방문했을 때, 귀욤은 브란트에게 나치가 운영했던 ‘강제수용소 부헨발트( Konzentrationslager Buchenwald)’도 방문할 것을 권했다. 브란트의 다른 참모들의 반대에도 방문이 실행되었다.

브란트가 강제수용소에서 헌화할 때, 동독의 국기가 펄럭이는 가운데 장엄하게 조화를 옮기는 동독 인민군이 전 세계에 중계되었다. 동독은 브란트를 들러리로 이용해 동독을 서독과는 별개의 주권적 독립국가로 공개적으로 공식적으로 선전할 수 있었다.

귀욤은 1970년 자르브뤼켄(Saarbrücken)에서 열렸던 SPD 전당대회에서 수상청과의 연락사무소를 이끌었고, 정부의 기밀문서에 공식적으로 접근할 수 있었다. 곧 그는 ‘엄격한 비밀’로 분류된 문서를 관리할 권한을 가졌다.

귀욤은 연방수상 연임을 위한 1972년 11월 19일 총선에서 브란트가 자신을 필수불가결한 존재로 여기게 만들었다. 귀욤은 수상의 연설과 행사를 세심하게 준비했고, 브란트가 이동 중에 처리해야 할 정부 문서가 가득 찬 가방을 들 수 있었다. 동독과의 ‘기본조약’ 체결(1972.12.21)을 앞두고 최종적 조율단계에 있었던 에곤 바가 브란트에게 보낸 2장의 서신도 손에 쥘 수 있었다.

▲모든 것을 듣고 보고 파악했다

브란트는 수상 연임이 확정된 후 귀욤에게 연방수상청 세 보좌실 가운데 하나를 이끌도록 요청했다. 브란트 집무실 바로 옆방에 근무하게 된 귀욤은 브란트의 대화를 도청했음은 물론이고, 수상청의 모든 것을 들었고 보았다.

귀욤은 서독의 모든 보안적 예방 조치에도 불구하고 ‘1급 비밀 취급 인가’를 받아 수상청 부서장 회의, 당 최고회의 등 모든 중요한 자리에 함께하면서 특별한 군사적 안건 외에 거의 모든 서독 정부의 기밀을 파악했다. 연방수상과 집권여당인 SPD 및 연방의회와의 협력을 책임지는 보좌관으로서 수상 곁을 지켰으며, 수상 관저도 무시로 출입하는 등 그는 수상의 그림자로 행동했다.

SPD의 모든 정황은 물론이고, 우리의 통일부장관 격인 전독문제부장관(1966-1969)을 마치고 당시 SPD 원내대표였던 헤르베르트 베너(Herbert Wehner), 연방국방부장관(1969-1972)을 마치고 당시 연방재정부장관이었던 헬무트 쉬미트(Helmut Schmidt)와 브란트 간의 갈등, 브란트가 소련의 레오니드 브레즈네프(Leonid Brezhnev) 공산당서기장을 상대하는 협상 전술, 동독과의 협상을 위한 서독의 준비계획 등을 파악했다.

귀욤은 그의 전임자로부터 서독 요원의 동독 내 침투에 관한 두 개의 서류철도 넘겨받았다. HVA는 동독 내 활동 중인 서독 요원들을 붕괴시키거나 역공작을 펼칠 수 있었다. 그의 아내 크리스텔 역시 선거 후 연방국방부장관이 된 레버의 비서가 되어 NATO의 전략 등 기밀에 더욱 쉽게 접근할 수 있었고 동독에 전달했다.

귀욤에게 최고의 순간은 1973년 6월 브란트가 노르웨이 가족 휴가에 동행을 제안했을 때였다. 이 기간 수상의 모든 서신이 그의 손을 거쳤다. ‘비밀’ 혹은 ‘1급 비밀’로 분류된 서신들이었으며, 그중에는 당시 미대통령 리차드 닉슨(Richard Nixon)의 친서도 있었다. 귀욤은 이들 기밀문서를 비밀리에 스웨덴의 한 호텔에서 슈타지 요원들이 촬영하도록 했다.

동독은 귀욤을 통해 브란트의 생각, 서독 정부와 SPD 내의 정황을 서독 장관이나 SPD 최고위원보다 더 빨리, 포괄적으로 파악할 수 있었다. 장관의 임면, 부처 내 주요 인사이동을 장관들보다 먼저 파악하고 동독에 전달해, 동독이 서독 정부 내에 침투시킨 간첩들을 시의적절하게, 눈에 띄지 않게 재배치할 수 있도록 했다.

▲다가온 위기

귀욤은 1973년에 처음으로 요시찰 대상이 되었다. BfV는 1950년대에 동독이 단파방송으로 지령을 보냈던 SPD 내에 침투한 슈타지 요원들이 브란트 수상의 보좌관 부부가 아닐까란 확신을 우연히 하게 되었다.

서독 BND는 동독이 단파방송을 통해 1956년 2월 1일 ‘게오르그(Georg)’에게, 1956년 10월 6일 ‘크리(Chr.)’에게, 1957년 4월 중순 ‘두 번째 남자에게’ 생일축하인사를 보낸 것을 탐지했다.

1973년 2월 BfV 고위간부 하인리히 쉬뢰게(Heinrich Schroegge)는 당시 3건의 간첩 사건을 조사하던 중에 귀욤이 모두 연계된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한 동료가 17년 전의 단파방송 생일축하인사 건을 전달하자, 날짜들을 조사한 결과 귀욤 부부가 간첩이라고 특정할 수 있었다.

보낸 날들이 바로 귀욤과 크리스텔의 생일과, 그리고 ‘두 번째 남자’는 부부 사이에 낳은 아들 피에르 보옴(Pierre Boom)의 생일과 일치했다. 이후 귀욤 부부에 대한 감찰이 시작되었다.

BfV 청장 귄터 놀라우(Günther Nollau)는 1973년 5월 29일 당시 내무부장관(1969-1974)이었던 한스-디트리히 겐셔(Hans-Dietrich Genscher, 1974-1992 외무부장관)에게 수상청에 동독 간첩이 암약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전했으나, 입증할 증거는 없었다.

브란트에게도 보고되었지만 그럴 리가 없다고 그의 혐의를 일축했다. 다만 브란트는 놀라우의 권고에 따라 귀욤을 관찰하고, 간첩 활동의 증거를 수집하기 위해 당분간 귀욤을 그대로 두기로 했다.

서독 수상이 동독 간첩의 혐의를 잡기 위해 사실상 ‘미끼’ 역할을 한 것이다. 당시 귀욤을 즉시 체포하지 않은 사실이 브란트에게 큰 정치적 부담으로 작용해 그의 사퇴에 영향을 주었다.

한편 귀욤은 그에 대한 사찰이 진행되고 있음을 알아차렸고, 이후 거의 1년 동안 조심스럽게 활동했다. 귀욤은 그가 원했다면 동독으로 건너가는 것이 어렵지 않았으나, 그는 여러 번의 탈출 기회를 활용하지 않았다.

▲투옥

1974년 4월 24일 체포될 당시 자신의 신분을 밝힌 것을 귀욤은 감방에서 미련한 짓이었다면서 후회했다. 볼프와 SED에 자신의 ‘잘못된 처신’에 용서를 구했다.

왜냐하면 그의 이 실토가 그를 감옥으로 향하게 했기 때문이다. 아직 그에 대한 혐의를 입증할 뚜렷한 증거가 없었고, 체포 당시 그의 집을 수색해도 급속 복사용 필름 몇 개 외에는 발견된 것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감옥에 갇힌 직후 그는 슈타지 소속 특수작전 장교임을 시인했고, 경찰 조사에서도 자신의 간첩행위를 설명하기도 했다. 귀욤이 서독의 수도 본과 그 인근 지역에서 부부로 위장한 동독 요원 암호명 ‘아르노(Arno)’와 ‘노라(Nora)’를 정기적으로 만나, 문서나 사진이 아니라 구두로 정치적 흐름, SPD 내 권력투쟁, 수상청의 전반적 상황 등을 전달했다고 밝혔다. 귀욤이 호텔, 식당, 차 등에서 만났던 이들 부부는 배달기사로 암약했으며, 신원은 끝내 확인되지 않았다.

귀욤은 HVA가 침묵할 것을 명령하자 동독에 의해 당할 불이익을 우려해 이후 모든 진술을 거부하고 진술에 대한 서명도 거부했다. 귀욤이 체포 직후에 왜 순순히 간첩 활동을 시인했는가 이유는 아직 명확하지 않다.

다만 그의 ‘영웅적 태도’에 대한 대가는 컸다. 20개월의 조사, 침묵으로 버틴 42일의 재판, 7년간의 감방생활이었다.

서독은 귀욤을 국가 기밀을 누설한 국가반역죄로 기소하고 재판했다. 서독 연방검찰청은 그가 1955년 9월부터 슈타지의 IM으로 활동했다고 적시했다. 귀욤은 1975년 12월 위중한 국가반역죄로 징역 13년을, 크리스텔은 8년을 선고받았다.

▲영웅으로 귀환

서독 정부는 귀욤이 연방수상청에서 간첩으로 암약한데 분노해 통상적으로 이루어지던 동독과의 간첩교환을 오랜 기간 거부해 귀욤은 7년 동안 감방에 갇혀 있어야만 했다. 귀욤과 크리스텔은 1981년 10월 동서독 간 간첩 교환으로 동독으로 건너갈 수 있었다. 서독은 동독에 체포되어 구금된 두 자리 수의 서독 간첩을 데려올 수 있었다.

그만큼 무게가 컸던 귀욤은 동독으로 돌아간 후 행한 슈타지 해외 간첩 요원 대상 교육에서, 그가 서독 정치권 내에서 눈에 띄지 않게 암약하면서 더욱 경력을 쌓아 결정적인 순간에 더 큰 역할을 하도록 상부의 지시를 받았다고 밝혔다. 이 장면은 비디오로 촬영되어 서독에도 전해졌다. 귀욤이 간첩 혐의를 받으면서도 동독으로 탈출하지 않은 이유로 추측할 수 있다.

동독 HVA는 시간이 갈수록 귀욤 사건이 동독 첩보사의 걸작으로 인식되도록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귀욤이 동독으로 돌아왔을 때 동독은 25년에 걸친 그의 활동을 슈타지의 빛나는 모범적 사례로 찬양했으며, 그를 대령으로 승진시키고 명예박사학위를 주었다. 새 거주지로 호숫가의 빌라를 제공했고, SED 서기장 에리히 호네커(Erich Honecker)는 그에게 동독이 수여하는 최고의 상인 ‘칼 마르크스 훈장’을 수여했다.

▲브란트 사퇴

귀욤 체포 후 2주 뒤인 5월 7일 브란트는 수상직을 떠났다. 서베를린 시장(1957-1966)으로 재임하면서 베를린장벽 건설(1961) 등 분단의 질곡을 누구보다 뼈아프게 체험했고, 누구보다 동독 및 동구권과의 관계 개선을 통한 변화를 추진해 성과를 거두었던 브란트는 1972년 12월 체결된 ‘기본조약’에 입각해 서독의 본과 동독의 동베를린에 각각의 ‘상주대표부(Ständige Vertretung)’가 5월 2일 문을 연 5일 뒤 퇴진해야만 했다.

브란트 사퇴에는 귀욤 사건이 결정적 계기로 작용했으나, 집권당 SPD 내 권력 투쟁도 한몫했다. 브란트의 후임으로 재무부장관이었던 쉬미트가 SPD 원내대표 베너의 지지에 힘입어 1974년 5월 16일에 연방수상으로 선출되었다.

브란트는 훗날 베너가 귀욤이 침투한 사실을 이미 벌써부터 알고 있었을 것으로 추측했다. 베너가 SED 서기장 호네커를 1930년대 독일공산당(KPD) 활동을 함께할 때부터 알고 있었으며, 1973년부터 호네커와 긴밀한 접촉을 가졌고, 베너가 자신을 느슨한 수상으로 간주해 수상직을 쉬미트로 대체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1992년 브란트의 사망 후, 브란트가 자신의 사퇴에 관한 베너의 역할, 그에 대한 감정과 그와의 관계를 청산하는 내용이 담긴 자필 기록이 1994년 발견되었다. 그러나 무엇이, 누가 브란트의 사임을 결정적으로 추동했는지 아직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정치적 순진함의 대가

HVA 총책 볼프는 1997년 회고록 ‘비밀전쟁의 간첩총책(Spionagechef im geheimen Krieg)’에서 귀욤의 간첩 활동이 밝혀진 것이 브란트 사임의 원인이 아니라, 오히려 서독 내 권모술수가 브란트의 몰락으로 이어졌다고 주장했다. 브란트의 신동방정책을 지지했던 동독의 입장에서 그의 사퇴가 그들의 이익이 아니었다고, 브란트의 추락은 사전에 의도된 것이 아니었다고 주장했다.

볼프는 귀욤 사건을 동독의 ‘가장 큰 패배(größte Niederlage)’이자 ‘정치적 자살골(politisches Eigentor)’로 표현했다. ‘작은 첩보적 효용성, 큰 정치적 실패’로 평가했다.

귀욤을 포함해 수많은 간첩을 서독에서 암약하도록 지휘했던 볼프는 통일 이후 기소에도 불구하고 어떠한 처벌도 받지 않았다. 1995년 4월 10일 사망한 귀욤의 장례식에도 모습을 보였다.

귀욤 사건 후 서독 내무부와 BND는 대대적인 내부 정비에 돌입했다. 그럼에도 슈타지가 밀파한 간첩들을 완전히 제거할 수는 없으리라 생각했고, 어느 정도는 각오한 서독이었다.

통일 이후 동서독 통합과정에서 통일독일은 경악했다. 슈타지가 서독 사회 구석구석에, 정부 요처마다 침투한 증거가 속속 드러났다. 양파껍질이 벗겨지듯 얼마나 많은 슈타지 요원들이 암약했는지, 무엇을 했는지 실체를 가늠할 수 없었다. 그렇게 서독을 상세하게 파악했던 동독이 무너졌다는 사실이 신기하기만 했다.

통일 직전 슈타지는 기밀문서들을 대대적으로 파손했다. 그럼에도 살아남은 슈타지의 서류철은 길이로 111㎞에 이른다. 아직도 이들에 대해서는 물론이고 분쇄기로 잘린 서류들을 조각조각 짜 맞추어 분석하는 작업이 진행 중이다.

통일 이후 독일은 동독의 슈타지 문서를 조사한 결과 귀욤에 관해서는 단 한 장의 기록도 찾을 수 없었다.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1990년 10월 3일 통일이 되기 전에 슈타지가 첩보 관련 문서들을 자체적으로 파기했거나, 아니면 서독에서 활동했던 동독 간첩들의 기록을 동독이 동독에서 활동했던 서독 간첩들의 기록과 함께 따로 관리했거나 둘 중의 하나일 것이다.

심지어 분단 기간 동안 동서독 주민 수백만 명의 인적 사항을 기록한 슈타지 중앙등록부에도 귀욤의 인적 기록은 존재하지 않았다. 단지 귀욤이 슈타지의 장교로서 연금을 청구한 기록만이 발견되었다. 실제 그는 동독으로 돌아와서 독일이 통일되고 1995년 죽을 때까지 연금을 챙겼다.

귀욤이 동독 간첩 혐의자라는 서독 BND의 보고에도 불구하고 귀욤의 서독 수상 접근이 거부당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당시 서독의 대 동독 화해 및 긴장완화 정책 추진 과정에서 서독 정부 내에 급속히 확산된 동독에 대한 ‘정치적 순진함(politische Naivität)’의 결과였다고 평가되었다. 동독의 슈타지는 브란트 정부가 동독과의 관계 개선을 지향하는 신동방정책에 입각한 독일정책을 펼친 것과는 상관없이 간첩 활동을 결코 소홀히 하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2024년 대한민국 국회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를 존중하지 않는 자, 2014년 헌법재판소가 위헌정당으로 강제 해산한 통합진보당의 후예가 5월 30일부터 국회 문을 넘나든다. '북한은 핵무기를 개발할 의지도 능력도 없다, 북한의 핵무기는 같은 민족인 우리를 겨냥하는 것이 아니다, 김정은의 핵 폐기 의지는 확고하다'고 말을 바꾸며 기만했던 이들이 국회에 또다시 넘쳐난다.

정치적 순진함일까 무지일까, 그렇게 믿고 싶은 것일까. 윤석열 대통령과 정부가 국내적으로, 남북관계에서, 국제적으로 어떤 그림을 그리고 구상하고 있는지 거의 완벽하게 파악해 북한에 전달하는 환영(幻影)이 스쳐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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