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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기웅의 통일토크] "헝가리와 중국의 다른 선택" (뉴스퀘스트, 2024.0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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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30회 작성일 24-05-07 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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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1989년 5월 2일 새벽, 오스트리아로 향한 국경철조망을 자르는 헝가리 군인들 [사진=베른하르트 홀쯔너]

<사진> 1989년 6월 27일, 철의 장막을 끊는 오스트리아 외무장관 모스크(왼쪽)와 헝가리 외무장관 호른 [사진=베른하르트 홀쯔너]

<사진> 헝가리-오스트리아 국경 개방 기념비 [사진=Marco]


[손기웅의 통일토크] "헝가리와 중국의 다른 선택" (뉴스퀘스트, 2024.05.07)

https://www.newsquest.co.kr/news/articleView.html?idxno=223025

1989년 5월 2일 새벽, 헝가리 군인들이 오스트리아와의 국경에 세운 철조망울타리와 탈출방지 전기보안시설을 해체하기 시작했다. 냉전이 시작되고 동구 사회주의국가들의 서방 단절을 상징한 ‘철의 장막(Iron Curtain)’에 구멍이 뚫리는 순간이었다.

헝가리가 서방과의 전면 폐쇄를 해제한 최초의 동방국가가 된 것이다. 서방과의 관계 개선 필요성, 특히 국경방어시설 관리 자체가 경제적으로 큰 부담이었을 정도로 어려웠던 경제적 요구가 배경이었다.

그날 저녁 언론에 이 사실이 보도되자 서독 수상청 직원 악셀 하르트만은 그의 상사인 루돌프 자이터스 수상청장관에게 “동독 주민들이 이 장면을 본다면 그들은 즉시 그곳으로 달려갈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실제 그렇게 되었다.

한편 당일 동베를린에서는 사회주의블록 가운데 헝가리-오스트리아 국경 약 360㎞의 붕괴 시작을 보면서 동독 공산당은 어찌할 바 모르는 충격에 휩싸였다고 당시 정치국위원 귄터 샤보프스키가 훗날 회상했다. 정치국위원 귄터 미타크는 헝가리가 사회주의 형제국들을 배신했다고 맹비난했다.

당 지도부는 즉시 ‘대형(大兄)’의 지원을 기대했다. 외무장관 오스카 피셔는 모스크바에 도움을 바라며 동구사회주의권 군사동맹체 ‘바르샤바조약기구(WTO)’ 회의소집을 요청했다. 헝가리 정부가 국경 개방을 취소하도록 압박하기 위해서였다. WTO는 서방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대항해 소련이 맹주로 만든 것으로 동독, 헝가리, 체코슬로바키아, 폴란드, 불가리아, 루마니아가 가담했다.

동독의 간절한 희망에도 불구하고 소련 공산당 서기장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그러한 만남 자체를 거부했다. WTO의 다수 회원국이 더 이상 개별 국가에 압력을 가해서는 안 된다는 그의 입장은 확고했다.

1985년 당서기장으로 권력 정상에 오른 고르바초프는 ‘페레스트로이카(개혁)’과 ‘글라스노스트(개방)’으로 상징되는 ‘새로운 정치적 사고’를 펼쳤다. 국내는 물론이고 대외 관계도 대상에 포함되었고, 가장 상징적 변화가 ‘브레즈네프 독트린(Brezhnev Doctrine)’을 포기한 것이다.

‘브레즈네프 독트린’은 전임 당서기장 레오니트 브레즈네프가 ‘프라하의 봄’이라 일컫는 1968년 초 체코슬로바키아의 민주화 개혁을 8월 소련이 무력 침공하면서 좌절시켰던 군사적 개입을 정당화하며 내세웠던 원칙이다. 사회주의국가의 주권은 그 나라의 발전 방향이 다른 사회주의국가 및 국제공산주의운동의 이익과 충돌하지 않는 범위에서만 보장된다는 ‘제한 주권론’ 주장에 입각했다.

고르바초프가 세운 새로운 원칙은 WTO 회원국들이 각자의 국내 정치를 스스로 결정할 수 있도록 허용한다는 것이다. 고르바초프는 WTO 국가는 물론이고 모든 국가들에게 선택의 자유를 인정했다.

1980년대 후반 확연히 드러난 소련 체제의 구조적 결함, 심각해지는 경제 문제, 전 세계적 반공(反共) 정서, 1979년 시작한 아프가니스탄 침공의 장기화 및 미국과의 군비경쟁으로 인한 경제적·정치적 부담, 주민들의 변화 요구 등으로 국내 문제 해결에도 벅차고 갈 길이 바쁜 소련이 동부 유럽이나 다른 지역 사회주의국가들에 소련의 의지를 강요하는 것이 점점 더 비현실적으로 되어간다는 사실을 직시한 고르바초프의 결단이었다.

고르바초프의 이 새 외교정책을 설명하기 위해 농담조로 붙여진 이름이 ‘시나트라 독트린(Sinatra Doctrine)’이다. 프랭크 시나트라가 불러 세계적 인기를 얻은 노래 ‘My Way(나의 길)’, 특히 가사 중 “I did it my way(나는 나의 길을 걸었다/내 방식대로 살았다)” 구절에 비유한 것이다.

고르바초프가 새로운 소련 및 사회주의권 건설과 새로운 세계질서를 모색하던 상황에서 동독 지도부는 고르바초프를 너무 몰랐다. 헝가리 공산당은 고르바초프의 신정책에 발맞추어 1988년 11월 23일 놀랍게도 경제학자 미클로스 네메스를 총리로 선출했다. 네메스는 취임 직후부터 서방과의 국경 개방을 고려했으며, 이미 1989년 3월 5일 국경개방계획을 고르바초프에게 알리고 승인 받았다.

헝가리의 역사적인 철의 장막 해제가 즉시 동독 주민의 대규모 탈출 행렬을 초래한 것은 아니었다. 별다른 팡파르도 없이 진행된 이 역사적 사건이 서방에는 물론이고 동독 주민에게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오스트리아 빈 주재 AP통신사에서 일하던 베른하르트 홀쯔너는 헝가리가 오스트리아와의 국경 폐쇄를 해제한다는 소식을 듣고, 5월 2일 새벽 현장으로 달려갔다. 헝가리 국경 마을 쇼프론 인근 국경에서 헝가리 군인들이 전선 및 철조망 절단기를 사용해 3줄 혹은 6줄로 서 있던 철조망 장벽을 자르기 시작했다.

홀쯔너는 이 역사적 장면을 사진으로 담을 수 있었고, 즉시 본사에 송고했다. 당시 현장에는 그와 헝가리 군사진가 몇 명 외 다른 사진가는 없었다. 특종이었다.

그러나 이 역사적 사건은 어떤 언론·방송에도 헤드라인을 장식하지 못했다. 동독은 당연했고, 오스트리아는 물론이고 서독에서도 비중 있게 다뤄지지 않았다. 심지어 AP도 홀쯔너의 사진을 싣지 않았다.

홀쯔너의 분노 속에 몇 주가 빠르게 지나갔다. 그동안 철의 장막 구멍은 넓어져가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세계는 주목하지 않았다. 홀쯔너는 이 역사적 변화가 무관심 속에 흘러가게 놔둘 수는 없다고 결심했다.

평소 친분이 있었던 오스트리아 외무장관 알로이스 모스크가 떠올랐다. 홀쯔너는 모스크에게 전 세계의 언론·방송을 초대한 가운데 헝가리 외무장관 호른 줄러 야노시(1994~1998 헝가리 총리)와 함께 철의 장막 해체 장면을 재현해 세상에 알리자고 제안했다.

오스트리아 정부 내에서도 반대가 있었다. 그들이 세우지 않은 철의 장막을 그들이 제거할 수는 없다는 논리였다. 모스크는 결심하고 호른에게 함께 역사를 만들고 보여주자고 전화로 설득했다. 마침내 6월 중순 헝가리의 결정이 떨어졌다.

6월 27일, 두 장관은 헝가리의 쇼프론과 오스트리아 국경마을 클링겐바흐를 연결하는 도로에서 만났다. 두 사람은 약 2㎞를 걸어 국경철조망울타리에 다가갔다. 그리고 억압, 폐쇄, 공포의 상징을 절단했다.

‘쇼’의 효과는 즉각 나타났다. 전 세계에서 온 20명의 주요 언론·방송이 그 순간을 포착했다. 당일 저녁, 서독의 KBS1 격인 ARD의 중심 뉴스쇼인 8시 ‘오늘의 소식(Tagesschau)’에 쇼프론 행사가 보도되었다.

당시 서독 TV·라디오를 시청·청취할 수 있었던 동독 주민, 특히 서독 방송프로그램 가운데 뉴스를 가장 선호했던 동독 주민들의 판단과 결단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헝가리를 거쳐 안전하게 서방으로, 서독으로 탈출할 수 있다는 ‘전설’이 동독 전역에 빠르게 퍼져나갔다. 많은 가족들이 여름휴가 계획을 다시 세웠다.

철의 장막이 열렸어도 헝가리 군인들이 오스트리아 국경을 여전히 경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전처럼 탈출하려다 붙잡힌 동독 주민들을 더 이상 동베를린으로 송환하지 않았다. 대신 다시 동쪽으로, 서방으로 보내주었다. 이들은 오스트리아를 거쳐 서독에 도착할 수 있었다.

동독 주민의 오스트리아 경유 대규모 탈출의 결정타는 역시 쇼프론에서 1989년 8월 19일 열린 ‘범유럽소풍(Pan-European Picnic)’ 행사였다. 오는 8월 이를 다시 소개할 것이다.

지난해 북한이탈주민 6백여 명을 강제 북송한 중국이 올해 다시 북송을 재개했다. 중국 지린성 ‘바이산(白山) 구류소’에 수용된 북한이탈주민 200명가량이 4월 26일 북한으로 송환됐다고 한다.

자유와 인간다운 삶을 찾고자 동독 독재체제를 탈출한 동독 주민들에게 문을 열어준 헝가리, 같은 이유와 목적으로 북한 독재체제를 탈출한 북한 주민들을 잡아다 묶어 다시 북한으로 강제 송환하고 문을 닫는 중국이 대비된다. 미국과 더불어 세계지도국으로 도약하고자 하는 중국이 걸어야 할 길, 세계에 보여주어야 할 길이 결코 아니다.

동독 주민의 헝가리를 통한 서방 탈출 그리고 서독행에는 서독의 헝가리 협상에도 힘입은 바 컸다. 우리의 대 중국 외교가 필수적인 이유다. 그럼에도 문재인 정권이 저지른 ‘탈북 어부 강제 북송’이 중국의 북한이탈주민 강제 북송을 막으려는 우리의 외교적 노력에 큰 걸림돌이 될 것임은 분명하다.

채상병 순직의 원인 및 책임 규명에 총공세를 펼치는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들이다. 이들이 대한민국 헌법을 존중해 북한 주민도 우리 국민으로 받아들인다면, 최소한 동포로 여긴다면 중국의 강제 송환에도 입을 열어야 한다.

윤석열 정부와 한 목소리로 중국의 행태를 비난하고, 해결에 힘을 합쳐야 한다. 북한 주민 인권을 경시했던 문 정권 행태를 반성하는 의미에서, 새로운 국회 제1당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서.

헝가리-오스트리아 국경 개방 현장에는 기념물이 세워졌다. 헝가리어와 독일어로 된 기념비가, 양 옆 모스크와 호른의 이름이 적힌 작은 오벨리스크와 함께 서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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